시작도 할 수 없는 관계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대학생인 그녀와 잘 되길 바랬던 걸까?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무슨 기대를 한 걸까?
처음 만난 날 진상 부린 나를 좋게 볼 거라고 근자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그녀에 대해서 안다고 감히 기대를 품었던 걸까?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그녀와의 현실적 차이를 자각했다. 내가 뭐라고, 어떻게 그녀와 가까워지겠다는 건지 나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시작도 안 했으니 접을 마음도 없다. 혼자만의 상상이었다. 환상에서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그래도 작은 성과가 있었다. 그녀와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는 것. 가끔 몰래 페친을 타고 가서 본 적은 있지만 이제는 직접적으로 그녀의 피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성과라면 그나마 성과였다. 야..호!?
그녀의 페북은 활발했다. 사진과 글들을 통해 그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여행을 좋아한다.
안양에서 산다.
기타를 친다.
음악을 좋아한다.
친구들이 많다.
소모임 활동이 많다.
생각을 글로 쓴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녀가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진만 올리고 글은 매우 짧다. 그런데 그녀의 피드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쓴 글들이 많았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의 글들은 내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 봤다.
그나저나 나는 참.. 뭘 하려는 걸까. 약속은 많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는데 '배움'이 끊겼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구석들이 있긴 하다만 부족해. 좋은 사람이 내게 본인의 세상을 깊게 오픈해 주었으면 좋겠다.
경쾌하고도 명쾌한 글. 자기에 대한 생각, 타인, 관계에 대한 생각.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이기에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생각을 단어로 바꾸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타이핑을 치고.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사진보다 글을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더 깊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외적 이미지보다 내면의 생각을 읽고 싶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그녀의 피드를 보고 있다 보니 점점 내 마음이 그녀에게로 끌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냐..'
핸드폰을 끄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그만하자.'
혼자만의 상상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내가 뭐라고..
다시 일상은 무한히 반복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회사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눈치를 보다가 친한 동료와 지하 커피숍에 가서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 한다. 12시가 되면 구내식당으로 밥 먹으러 간다. (왜 꼭 12시가 다 돼서야 가는가? 다른 팀은 11:30분에도 잘도 먹으러 가는데..) 야구가 없었다면 팀장님과 밥 먹을 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 일 얘기밖에 안 했을 것 같다. 회사에서는 밥 먹는 것도 일이다.
날이 좋은 날은 점심 시간에 여의도공원을 걸었다. 10월 말 단풍은 절정이 이른다. 이맘때 여의도공원의 울긋불긋 단풍으로 다채로운 색이 된다. 이 회색섬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때가 바로 가을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여의도의 봄보다 가을을 좋아한다. 점심시간 여의도 공원에는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삼삼오오 비지니스 캐주얼 복장을 입은 회사원들이 산책을 한다. 저마다 다른 사원증을 메고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지 모두 즐거워 보인다. 회사에서 일은 모두 잊은 채 다들 화기애애하다. 나도 그 속을 거닐며 '여의도 다닐 만 한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딱 여의도 공원을 걷는 이 가을 점심시간만...
퇴근 길 공덕역.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아무런 자극이 없으면 그냥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면 된다. 그런데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도 크다. 비행기 타다 자유낙하한 것처럼 기분이 쳐졌다. 사업도, 연애도, 회사도.. 뭐하나 내 인생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 출퇴근 인생도 언제까지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매일 출근은 하는데 사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게 내 마음이다. 그렇다고 다른 대책이 있느냐? 없다. 호기롭게 올해 초 시작한 나름의 창업이 가을 낙옆처럼 우수수 떨어져버렸다. 문래동 사무실을 접은 후 회사 월급이 더 간절해졌다. 영락없는 월급쟁이가 된 것이다. 같이 일하던 동생들도 폐업 이후 연락이 뜸해졌다. 그나마 정재와 가장 연락을 많이 했었는데 모이는 구심점이 없으니 만나는 횟수가 드물어졌다. 퇴근하고 만날 친구도 없고, 술 마시고 싶은 사람도 없고 나는 더 혼자가 되었다.
쓸쓸했다.
외로웠다.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가을 깊어갈 무렵 나는 휴가를 내고 혼자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당신이어야 합니다. 5화에서 계속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astobe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