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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석천 Feb 11. 2016

빠이를 즐기려면 빠이에 가지 말아라

빠이라는 이름의 토끼굴, 아무것도 없는 그 이상한 곳


서점에서 '빠이'란 책을 보고 화들짝 놀랐던 이유는-

(빠이가 '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였던 것도 1% 정도 있지만,)

빠이에 대해서 쓸게 한권이나 있단 말이야?? 라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두괄식으로 얘기하자면,

빠이에는 할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알고 간다면, 누구에게든 '마력적인' 곳이 빠이다.




배낭여행의 중반쯤, 라오스로 넘어가는 관문 정도로 생각하고 빠이를 선택했다.


구불구불, 곧 사고라도 날 것 같은 -그리고 실제로 우리 앞 차는 사고가 나서 벼랑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위태로운 산길을 달리고 달려도 끝나지 않는 여정.

급커브를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현지 운전 장인 기사님 덕분에 멀미가 최고조에 달해, 차를 세워달라고 할까 말까 고민할때쯤- 간이 휴게소에 차가 멈췄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산 중턱 간이 휴게소. 덩치가 크거나 키가 큰 서양 여행자들 사이에서 쬐끄만 동양인 둘이 반가웠는지 누군가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아주 무심하고 시크하게. 지나가듯 묻는 그 말이 반가워 덥썩- 그 분들이 타고 온 승용차로 옮겨탔다. 덩치만큼이나 큰 서양 여행자들 배낭에 처참하게 깔린 우리 배낭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채.


오랜만에 만난 한국사람들이 반갑다며, 빠이 타운과도 거리가 꽤 있는 지인의 집에 데려가 주셨다. 산 중턱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숲 위에 자리 잡은 나무집. 태양과 가까워서인지 눈이 부셔 실눈을 떠야만 겨우 쳐다볼 수 있었던 집. 그 집에서 빠이의 하늘을 내려다본 순간-

앨리스의 토끼굴에 빠져버렸다.


높고 깊은 빠이의 하늘. Pai, Thailand ⓒ제석천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한국인이라지만, 타지에서, 그것도 인적 드문 산길에서 남의 차에 덥썩 올라타 깊고 깊은 산 속까지 따라가다니.


그게 다 빠이의 마력 때문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진심어린 환대와 귀한 김치까지 얻어먹고, 무사히 빠이 타운까지 돌아왔다. 빠이 교통의 중심인 Aya service에 갔더니 두고 내린 배낭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소파 위에서 우리를 반겼다. 반나절의 신기한 여정을 함께 했지만, 그 분들과는 쿨하게 헤어졌다. 여느 여행자가 그렇듯, 후일을 약속하지 않고.


그러나, 이미 깊이 빠져버린 토끼굴에서는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Pai, Thailand ⓒ제석천
빠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하늘과, 말도 안되게 아름다운 구름, 뻥 뚫린 한적한 도로 빼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게 참 묘하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래봤자, Aya service에서 빌린 스쿠터 타고 오늘은 동쪽으로- 내일은 서쪽으로- 탈탈탈 달려보는 것 뿐인데,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열흘이 되고- 결국은 라오스행 티켓도 취소해버렸다.


메인타운이라고 해봤자 한바퀴 크게 돌아도 십여분이면 끝인 작은 마을.

느즈막히 일어나 스쿠터 타고 하늘 구경 실컷 하고, 뜨거운 오후는 에어컨 빵빵한 조그만 커피숍에서 보내고, 밤이 되면 버팔로 바에 가서 매일 즉석 잼이 이뤄지는 라이브 연주 들으며 쌩쏨 버켓을 살짝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

이게 전부였는데 왜 그곳을 떠날 수 없었을까.


Pai Town, Thailand ⓒ제석천

고도가 높아 여름에 시원하다는 이유로 원래는 여름 휴양지였던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 둘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예술가들이 만든 마을답게, 이 작은 마을 곳곳에 그루브가 넘쳐 흐른다.


빠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자연과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아기자기함 빼고는.


그렇지만, 이곳엔 뭔가 신기한 마력 같은 게 흐르는 것 같다.

꽤 긴 시간 머물러서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빠이에서 신기한 인연을 많이 만났다.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우연히 만나 지인의 집까지 초대해주셨던 분은 물론이거니와,

맥주 한병 사러 들어갔던 조그만 구멍가게에서는 빠이에 살고 계신(=눌러앉은) 한국인들 모임이 열리고 있어 그날부터 며칠을 함께 술로 밤을 지새웠다.

지나가다 '끓인 라면'이 먹고 싶어 무심코 들어갔던 골목 끝 가게의 주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셨다. 전쟁 후에도 한국이 너무 궁금해 서울에 한번 가본적이 있다며, 오랜만에 본 한국 사람이 반가워 한참을 짧은 영어와 손짓발짓을 섞어 얘기하셨더랬다.

게다가, 아주 아주 우연히, 내 친구가 3년 전 여행에서 큰 신세를 졌던, 그러나 여행자답게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헤어졌던 은인을, 동네 슈퍼 앞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만났다.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 이 우연한 만남을 축하하며 냉장고의 맥주가 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자의 룰대로, 또 다시, 본명도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고, 그렇게 헤어졌다.


흔한 일들이 모이고 모여서 사건이 되듯이,

별것 아닐 수 있는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서 빠이를 잊을 수 없는 마법 같은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Pai Town, Thailand ⓒ제석천

아마도 빠이의 이 이상한 마력을 맛본 사람들이 많아지고, 빠이라는 토끼굴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들이 늘어나서,

빠이가 인기 여행지(?)가 되었나보다. '빠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 여행지로써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기를 얻었으니 내가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테니 사실은 고맙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모르겠고.

이 김에, 빠이의 소문만큼은 제대로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자 보탠다.


블로그에서 '빠이 좋다갈래 가봤는데 별거 없더라'라는 평을 많이 봤다.

어떤 여행 커뮤니티에서는 '저 지금 빠이 왔는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요.'라는 글도 봤다.


빠이는 별거 없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

인기 포인트라서 한번 '찍고' 가려는 거라면 목숨을 내놓고(?) 산길을 달려가는 6시간이 아까운 곳이다.

뭘 '하러', 혹은 '보러' 간다면, 도착하는 순간 실망하게 되는 곳이다.

늘 시간이 아깝고 매순간 뭔가를 해야하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힘들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가야 한다.


떠날 날짜를 정하지 말고 가야 한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빨리 떠나버릴 수도 있고,

빠이의 마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도착 즉시 스쿠터를 빌려야 한다.

빠이에서 스쿠터가 없다는 건 발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안.전.제.일.

여행자들의 스쿠터 사고 (그것도 대형 사고)가 가장 많은 게 이곳이니까.


오늘 뭘 할건지, 뭘 했는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할 것도 없고, 한 것도 없을테니까.




여행은 휴식이고 쉼이다.


우리처럼 늘 바쁘게 사는, 바쁘게 살지 않으면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배워야 하나보다.


그저 빈둥거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술 한잔 하는 걸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죄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이곳 빠이에서.


Do nothing in P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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