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째 암투병을 하다가 금요일(6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매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과 4학년인 딸이 상복을 입고 아빠와 함께, 조문 온 사람들을 맞이 한다. 그동안 남편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자매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에 자매를 천국으로 떠나보낸 날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인간인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그녀와 그 가정을 향한 교인들의 지속적인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함께 동승한 집사님의 이야기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시는 분이신데, 저번에도 그분으로부터 한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편에게, 만약 나를 요양시설에 보내는 일이 있다면, 절대 내가 근무하는 이곳으로는 보내지 말라고 했어요."
"왜요? 안 좋은가 보죠?"
"아니에요. 너무 잘해주기 때문이에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 죽어요. 이 요양시설에 들어오시면 노인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그분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식사 때문에 요양시설로 들어오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녀들이, 혹은 배우자가 하루 세끼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주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세끼 다 따뜻한 밥을 제공하는 요양시설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또한 언제든지 질병에 대한 보살핌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150여 명의 노인들이 있는 이 요양시설은 꽤 괜찮은 식사를 제공하는데, 요양보호사들의 첫 번째 임무가 노인들이 식사를 잘하시도록 돕는 일이라는 것이다.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시는 분들에게도 최대한 음식을 밀어 넣어 드린다. 그 결과 치매, 혹은 누워서 꼼짝을 못 하시며 의식이 희미한 분들조차도, 살이 포동포동 쪄,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어, 언제 돌아가실지, 죽음을 붙들어 매고 있는 곳이 그곳이라는 것이다. 또 입으로 하는 식사를 노인들이 못 하시게 되면, 시설장은 자녀들을 호출한다. 부모의 생명을 위해서는 목에 호스를 꼽는 수밖에 없다고 설득한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들은 이에 동의하게 되고, 호스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 노인들은 다시 길고 가느다란 생명줄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녀들은 처음에는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혼자 계시다가 혹은 부실한 식사를 하시다가 이곳에 오셔서 살이 포동포동 찐 부모의 모습(팔다리는 쇠고챙이 같으나 배부분이 살이 쪄 둥근 공 모양 같이 된다고 한다)에 환호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돌아가실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살아계시고, 꼬박꼬박 백여만 원의 돈을 지불하게 되니 경제적인 부담도 느끼게 되고, 그때부터 차즘 자녀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 의식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세월아 네월아 보내고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건강하게 85세에서 90세 정도까지 살다가 3일 정도 아픈 뒤 죽었으면 좋겠어요. 이 요양시설은 날로 번창 일로에 있어요. 죽어나가는 사람은 드물고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저희 요양시설은 노인들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고, 시설도 아주 청결해요."
겉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낙원인데, 죽을 권리가 박탈된 채, 육체의 건강을 사육하는 인간 사육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죽음을 인위적으로 연장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사는 것 못지않게 잘 죽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게 된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라도 해서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의식이 없는 본인이 원하기보다 식물인간이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자식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고마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도로 인간다운 삶, 즉 생각하고 말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위적으로 연장된 삶이 치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죽음도 내가 죽고 싶다고 죽음의 형태와 날짜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엄마가 췌장암 선고를 받았어요.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하더군요. 그런데 엄마는 나이가 80을 넘었는데 무슨 수술이냐고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매일 기도를 하셨어요. 병원에 가지 않고 잘 죽게 해 달라고요. 원래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셨어요. 정말 엄마의 기도대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집에서 모든 활동을 정상적으로 하시다가, 이틀 편찮으시고 편안히 돌아가셨어요. 일 년 이상을 편안히 사시다가, 기도대로 돌아가신 거죠."
며칠 전 만난 한 영어 선생님이 영어 연구회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자녀들에게도, 나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죽음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또한 쉽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감사했다. 죽음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선하신 하나님, 그분을 나는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