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완벽한 인생도 없는 것이다.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아~ 이때 이렇게 했었어야 했는데~'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또한 '아~ 그때 그 일을 하기를 너무 잘했네'하는 순간들도 종종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괴테의 이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 보라. 그러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금방 알게 된다."
내가 아는 이 사람은 항상 유쾌한 사람이었다. 대학교수라는 자리에 있었지만 잘난 체하지를 않았다. 그 당시 시간강사였던 나는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지위나 직책의 서열로 상대방을 누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동등한 인격체로 상대방을 대하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교수들이 각자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가득히 소장하면서 이것저것 시간 날 때마다 뽑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었다. 내가 이일을 그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좋아요, 김 선생님. 이 방 열쇠를 하나 줄테니까 이방을 함께 공유합시다. 내가 없을 때 이 방에 들어와 마음껏 이 방을 누려 보시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누가 감히 자신의 방을 다른 사람과 서슴없이 공유한단 말인가?
열쇠를 받아 든 나는 한편으로는 너무 기뻤고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그 대학이 위치한 도시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토, 일요일에는 내가 그 방을 공유할 수 있었다. 토요일 하루 종일 그 방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물론 주변에 도서관도 있고 집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 혼자만의 공간이 그 당시의 나에게는 절실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새 차를 장만했다고 나에게 자랑을 했다. 그동안 그가 어떤 차를 타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자랑을 많이 하기에 나는 '이 교수님이 외제차를 샀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럼 그 차를 한번 보러 가자'라고 제안을 하게 되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그는 계속 싱글벙글이다. '엄청 좋은 차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자, 이 차예요"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멋진 외제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빨간, 자그마한 프라이드 한대가 서 있었다.
"아니 교수님, 이 프라이드 한대 사신 것 가지고 그렇게 자랑하셨나요?"
나는 나의 기대감이 너무 부질없이 무너져서, 약간 뽀로퉁한 목소리로 말했나 보았다.
"김 선생님, 이 차 멋지지 않나요? 차의 외모가 중요하나요? 프라이드의 기능이 절대 외제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교수라면 이 정도의 차는 타야 된다'는 나의 허황된 고정관념을 일순간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내가 아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지식인인데 늘 잠바와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왜 그 많은 돈을 놔두고 꼴이 맨날 그 모양인가요?"
"제 외모가 중요합니까? 저는 이 차림에 만족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 남들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의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자여서 다른 사람의 판단과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 배부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우쭐대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청년은 얼마 받지 못하는 월급쟁이인데도 최고급 벤츠차를 탄다. 나는 이 또한 내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어서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저의 인생이 잘난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차를 타고 다니니 사람들이 저를 사람으로 대접해 줍디다. 제가 괜찮은 인간으로 보이나 봅니다. 그래서 할부액으로, 차 수리비로 거의 모든 월급을 쏟아붓고 있지만, 손해 보았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습니다."
나는 이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짠해졌다. 그의 아픈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고, 또한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 세태 때문에 청년은 자신의 자존감을 태양빛이 비취면 안개같이 사라질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느라 허겁지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없을까?
"만약 내가 쪼개지는 가슴을 구했다면, 헛된 삶을 산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아픈 삶을 위로했다면, 혹은 고통을 가라앉혔거나 쓰러져 가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도와 둥지에 넣어주었다면, 헛된 삶을 산 것은 아니다.(에밀리 디킨슨)"
이 말을 기억한다. 사랑의 눈 만이, 공감의 마음만이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열쇠라고 에밀리 디킨슨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사랑받고 공감받기를 원하지, 자신이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한 사람에게, 즉 좋은 이웃을 구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드신다(눅10:29~37).
'강도 만난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 레위인(종교지도자)은 다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그 당시 가장 비천한 계급인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와 치료해주고 돌봐준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로 다시 질문하신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지, 내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누군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힘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훗날 우리가 인생을 되돌아볼 때, 늘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 '아~ 그때 그일 하기를 너무 잘했네'라는 순간들이 더욱 많아져, 좀 더 인생의 부족한 부분들이 채워지기를 원한다. 육신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을 열어,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나 자신이 되기를 바라며 2021년 새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