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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Mar 10. 2024

초등학교 입학식

환하게 차려있는 아이 옆에,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아이 한 명에 적어도 서너 명의 어른이 따라왔다. 얼마나 아이가 귀한 존재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복도에 쭉 늘어서 교실창문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표정은 한편으로는 대견하다는 흐뭇한 표정과  한편으로는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의 감정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부모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도 마음 한편이 괜히 울컥해졌다. 온실 속에 키우던 귀한 꽃송이가 들판으로 나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의 마음과 앞으로 겪야 할 많은 문제 때문에 저 부모들이 당할 아픔을 생각하니, 내가 괜스레 눈물이 났다.


교감선생님이 다니시면서 이렇게 외친다.

"빨리 강당에 올라가세요. 아이들이 담임선생님과 눈 맞춤을 하고 익숙해져야 하는데 엄마, 아빠 쳐다본다고 선생님께 집중하지 못해요. 올라가세요!"


올라가기를 재촉하자, 한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한다.

"저, 첫 아이예요!"

'첫'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숙함과 경건함 때문에 더 이상 교감선생님도 그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엄마는 지금 아이와 함께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에 발을 담그려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목에 선물목걸이를 걸고 등장한다. 

입장한 아이들은 둥글게 강당을 보며 앉아있고, 부모들은 서 있다.

옛날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말)를 입학할 때는 아이들은 길게 줄 서있고, 부모와 축하객들은 앉아있었다. 


세상이 바뀌기는 많이 바뀌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나의 1학년 출석번호는 63번이었고, 한 학년에 12 학급이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두 명 낳아 잘 기르자"가 "아들, 딸 구별 말고 한 명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더니, 급기야 말 잘 듣는 우리 민족은 오늘의 사태를 만들어 놓았다. 


이 학교의 초등학교 입학생 수는 한 반에 22명 내지 23명으로, 모두 3반이다. 유치원 입학생은 단 4명! 바로 옆의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입학생이 없어서 폐원되었다고 엄마들이 수군거린다. 이런 상황이니 내년의 이 학교의 1학년 입학생수도 심히 걱정이 된다.

비어있는 네 개의 의자가 유치원 입학생을 위한 의자이다.

학교에서 준 선물과 부모들의 꽃다발과 선물로 아이들은 오늘 함빡 웃음을 짓고 있다.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 정문 담벼락에 이런 글을 써 놓았다.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벽을 도색해 주고 쓴 문구인데, 아침저녁으로 교문을 드나들면서 '어른들이 얼마나 살아가는 것이 힘들면, 자신들의 소망을 아이들에게 이렇게 표현해 놓았을까'하고 나는 생각하곤 했다.


인생에 꽃길만은 없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도서 7:14)"


이 1학년 입학생은 

1. 조직의 쓴맛을 볼 것이다. 집에서야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했지만, 학교에서는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여야 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이것이 힘들 수 있다. 자기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인 것이다. 


고2 담임을 할 때다. 학부모 상담을 하는데 엄마, 아빠가 다 출동했다. 아빠는 한국 최고의 대학의 교수이고 또 아주 젊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충만했다. 그런데 엄마는 계속 눈물을 지으며 아들 걱정을 한다. 그 집의 첫아들인 나의 반 학생은 학교생활 부적응 상태이다. 아침에 겨우 학교에 온다. 와서는 매일 조퇴한다. 학교에 오면 소화가 안 되고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그 아이가 가져온 진료확인서에는 '신경성 위염'이나 '스트레스성 두통'으로 적혀있다. 그러니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의 교수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 때문에 부모도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문제의 발단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엄마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이 아이와 같은 학교에 있었던 선생님의 말로는 '그 이유는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 아이가 왜 학교조직에 부적응하게 되었는지. 부모의 말에 의하면 중학교 때까지는 온전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 고등학교는 그 지역에서 아주 좋은 학교이다) 그런데 고1 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연히 성적도 좋지 않다.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곧 대학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가 큰 걱정인 것이다. 


이 아이는 절대음감을 가진 학생이다. 중학교 때 공부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두각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아빠는 큰돈을 드려 좋은 악기세트를 구비해 주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밤낮으로 악기에 붙어 있더니 작곡까지 하게 되었고 그 작곡한 음악을 기성 작곡가에게 팔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이에게 직접 들었다.)

"너 집에 가서 뭐 해?" 

"일단 자고 쉬어요."

 "그래? 그러고 나서는?"

"음악학원에 가요" 

"학원에 갔다 와서는 늦게까지 작곡하니?" 

"아뇨. 아빠가 요즘 늦게까지 자지 않는 것을 싫어하셔서, 일찍 자려고 해요."  

아이의 소원은 대학도 싫고 하루종일 음악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 공부에 취미가 없어져버린 것이다.(그런데 아이는 과학시간은 좋아한다. 과학반장을 맡고 있어서 과학이 시간에는 조금 늦게 조퇴한다.)


내가 보기에 이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게 된 것 때문에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 절대 실패한 인생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등학교 조직이 본인에게는 쓴 나물이 된 경우였다. 그래서 부모에게 말했다.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의 고등학교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이 아이는 재능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분명하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더 좋아질 겁니다."

"그래도 대학교는 가야잖아요?"

"음. 본인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분명히 있으니까, 그 일을 하다가, 가고 싶을 때 대학 가면 어떨까요?"

한국의 학력사회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정점에 서 있는 아빠에게는 이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가진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는 담임이 고마워서인지 눈물을 멈추고 얼굴이 조금 환해지기 시작했지만, 아빠는 아직도 영 시원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 학교를 떠나온 내게 그 아이의 소식이 좀 궁금하다. 조직사회를 벗어난 지금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지?)


2. 관계의 쓴맛을 볼 것이다.

집에서야 부모가 혼낼 때도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사랑이라는 '보호하고 다독여주는' 감정이 깔려있다. 그래서 잘못해도 용서를 받는다. 그래서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이 아이들은 상대방에게 허용받기만을 바라게 된다. 이 정도 잘못은 당연히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친구사이가 나빠지고 심지어는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역시 그 고등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 반의 한 여학생이 친구가 없다. 늘 혼자 다닌다. 공부를 아주 못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중학교에서 오신 선생님께 물어보니 중학교 때도 그랬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아이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 아이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약속시간을 정해서 같이 점심을 먹고 함께 산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이에게는 별 문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학교 때 이 아이가  친구들에게 약간 따돌림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 문제로 학폭에 신고하게 되었고, 상대방의 아이들은 징계를 받았고, 그리고 그 이후에는 학생들이 이 아이를 기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를 사용했는데도, 계속 이 아이는 피해자로 남게 된 경우였다. 


몇 번 나와 함께 점심을 먹더니 이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저 혼자 먹을래요. 혼자가 더 편해요."

이제 대학을 갔을 것인데, 부디 이 아이가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기를 기대해 본다.


3. 성적의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학교라는 사회가 물론 인성교육도 하지만, 그래도 최우선 목적은 지식전달이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적 능력을 계발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서 너무 뒤처지는 아이들은 자연히 기가 죽게 되고 힘이 빠지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얼마나 학교의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이런 말까지 등장했겠는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성적이 왕노릇 하지만, 사회에서는 성적만이 아니라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고, 심지어 공부는 못 했지만 양적, 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불행히도 여기는 아직 학교인 것이다.


둘째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 중부의 전통 있는 기독교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된 옛날 일이 생각난다.

학교 첫날 교장선생님이 이 아이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얘야. 학교입학을 축하한다. 그런데 너는 외국인이고, 환경은 낯설어서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야.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을 가지고 있니?"

공부만 하다간 딸은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너 어떤 운동을 잘하니? 그 운동으로 너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단다."

공부밖에 모른 딸은 이번에도 묵묵부답이다.

"너 어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니? 악기연주로 너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단다."

악기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딸은 이번에도 묵묵부답.

"얘야. 너 예수님은 확실히 믿니? 그럼 기도로 너의 힘듦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단다."


나는 딸에게 들은 이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꽃길만 걸으라는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어려움을 이길 방법을 제시해 주는 그분의 그 지혜가 놀랍도록 현명해 보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두 가지의 익숙한 운동과 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육시킨다. (대학교 때부터 닥칠 어마어마한 과제에 대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미리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당할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길 방법을 가지게 해 주는 것이다.)


나는 담벼락에 이런 글귀를 써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씩씩하게 자라라(그래서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혹은 "건강하게 자라라(영혼육이 건강해야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가 있다)"


이 말들은 우리가 자랄 때 오히려 많이 들은 말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사탕발림의 말들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들을 격려하는 데는 오히려 옛 문구들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꽃길이라는 사탕발림 때문에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해 아이들을 더 좌절하게 만들지 말고, 오히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과 힘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과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신입생 여러분! 씩씩하게, 건강하게 자라세요! 그래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는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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