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학교를 옮기다.
"삶을 사는 방식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기적이라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작은 아이가 미국으로 간 지 벌써 10개월이 다가온다. 미국 교환학생 동안의 학업이, 한국 교육 과정에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작은 아이는 일반고등학교의 1학년으로 다시 들어갈 예정이었다. 작은 아이는 이 부분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했다.
"엄마, 내 친구들은 다 2학년인데, 내가 1학년으로 다시 들어가야 해? 싫어!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나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면 안 돼?"
작은 아이는 10개월이 다 되어가니 이제 미국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가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비용도 간신히 감당한 우리 처지에, 미국 사립학교로의 전학은 정말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화할 때마다 간청하는 작은아이 때문에 남편과 나의 마음은 심히 힘들어졌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미국 사립고등학교의 홈페이지를 뒤적이며 학비가 얼마인지를 검색하곤 했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작은 아이의 홈스테이 부모님은 아이 혼자서 부모를 떠나 오래 있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제 부모님에게 돌아갈 날짜가 며칠 남았구나'라고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작은 아이가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그들에게는 의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작은 아이는 작은 아이 나름대로, 남편과 나는 우리 나름대로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무슨 방법이 있는 지를 계속 찾고 있었다.
"엄마, 다음 주말에 서울로 가셔야 해요."
"왜? 무슨 일이 있니?"
"여기 옆 도시에 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요."
" 아니, 무슨 일 때문이지?"
작은 아이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제 미국을 떠날 날이 한 달이 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홈스테이 엄마는 네브래스카의 여러 곳을 보여주기 원했다. 그날도 홈스테이 엄마가 옆 도시인 센트럴 시티(Central city)의 치과에 가면서 작은 아이를 데리고 갔다.
"얘야, 저 고등학교가 네브래스카에서 가장 좋은 네브래스카 기독교 기숙학교란다. 1959년에 세워졌으니 아주 전통이 있는 학교이지."
치과에 가는 길에 홈스테이 엄마는 한 건물을 가리키면서 학교 설명을 했다고 한다. 치과 진료를 받는 동안 시내 구경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작은 아이는 곧장 고등학교 교장실로 달려갔다고 한다.
" 저 이 학교에 다니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갑자기 방문한 외국학생에게 교장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아주 편안하게 대해주셨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몇 명 다니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학부모 상담을 위해 다음 주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면서, 그때 너의 부모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었다.
남편과 나는 약속된 날, 서울에서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통역 한 분을 대동하고 오신 교장선생님은 아주 온화한 분이셨다. 교장선생님은 아이가 어떠한지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더니, 기숙사 학교로 보낼 의향이 있는지를 물으셨다.
"장학금을 좀 받고 싶습니다."
남편과 나는 물론 의향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장학금을 좀 주시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얼마만큼의 장학금을 원하시나요?"
우리는 통역에게 우리가 원하는 금액을 말했다. 그러자 통역하시는 분이 자기는 도저히 이 금액을 통역해 줄 수가 없다고 한다. 너무 얼토당토않게 많은 금액을 장학금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미국의 장학제도에 대해 잘 알지를 못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비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원하는 기관도 몇몇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도 당연히 그런 줄로 알았다. 훗날 작은 아이가 대학교로 진학해서 그 학과 최고의 장학금인 Presidential Scholarship(총장 장학금)을 받았는데 500$, 즉 우리나라 돈으로 54만 원 정도였다. 그러니 그 날 우리가 제시한 금액은 정말 굉장히 큰 액수에 해당한다. 기숙사비를 포함한 모든 학비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통역하시는 분에게 계속 머뭇거리시다가 마지못해 입을 떼셨다. 우리가 요구한 금액을 들으신 교장선생님은 처음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정말 굉장히 많은 장학금입니다. 이 학교가 생긴 이래로 이만한 장학금을 준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외로 인정하겠습니다. 대신 화장실 청소와 같은 근로봉사를 좀 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통역하는 사람도 깜짝 놀랐다. 이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작은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몇 주전에, 네브래스카에서 가장 좋다는 기숙학교로 가게 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이는 기숙학교로 옮긴 후 너무 행복해했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이 작은 아이에게는 전혀 엄격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홈스테이 때보다 더 많은 편안함과 자유를 만끽하며, 학교생활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 학교의 전교 부회장으로, 또 자랑스러운 학생으로 지역신문에도 났다. 나중, 작은 아이에게 물어보니 전혀 근로봉사를 한 적도 없다고 한다. 지나치다가 마주친 교장선생님께서는 다른 학생에게 작은 아이가 받는 장학금에 대해 비밀로 해 주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아이들이 교환학생으로 가 그곳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 적응할만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또다시 적응하느라고 고생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작은 아이가 이런 과정을 생략하게 되어 참으로 감사했다. 추수 감사절이나 성탄절 휴가 때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기숙사의 아이들을 몇몇 씩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함께 휴가를 보내셨다. 학생들을 품어주는, 조용한 도시의 따뜻한 학교에 대해 나는 지금도 감사한다. 작은 아이는 스트레스가 줄어서인지 서서히 살도 빠지기 시작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작은 아이에게서 실감한다. 집에 있을 때에는 늘 불만이 가득했다. '우리 집은 왜 이래'로 시작되는 불평은 한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10개월 홈스테이를 하고 나서는 아이가 완전히 바뀌었다. 전화할 때마다 "엄마, 아빠, 감사해요.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홈스테이 생활이 작은 아이에게 가정과 부모의 소중함, 또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해 준 것 같았다. 낯선 세계에서의 힘든 생활이 작은 아이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알의 껍질을 깨는 고통이 있어야 새가 창공을 훨훨 날듯이, 사람에게도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