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드릭 몰리 저) '친구'에 대하여
"지금으로부터 5년 후에 당신은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지금의 당신과 거의 같을 것이다. 하나는 당신이 읽은 책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가까이하는 사람이다." (찰스 존스)
무엇이든 혹은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내가 진짜 멍청한 소리를 할 때도 껄껄껄 웃어주는 친구,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나에게 누군가 말할 사람이 필요할 때, 내가 심각한 문제에 빠졌을 때, 혹은 내가 괴로울 때, 나의 곁에 있어 줄 친구! 이런 친구가 있는가?
학창시절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경력을 쌓고, 삶의 동반자를 택하며, 가정을 이루고, 삶을 살아가며, 물질을 축척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렇게 삶을 세워가는 단계에서는 친구를 위해 낼 시간이 많지 않다. 또한 그래야 할 필요도 크게 느끼지 않는다. 결국 가족들이 관계에서 느끼는 필요의 대부분을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는 오직 다른 친구들 -같은 구두를 신고 걷는,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비슷한 삶의 경험을 지닌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필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인들 사이의 우정은 시작하기도 어렵고, 지속하기는 더 어렵다.
대부분의 성인들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는 사업, 일과 관련해 맺어진 관계이다. 그들은 하루종일 같은 일을 함께 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목표는 어느 정도의 우정과 동료의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일을 통한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 특히 깊이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족한 우정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지인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우리의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기꺼이 우리말을 들어주는, 즉 신속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친구가 되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어줄 이가 없을 수도 있다.
참된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에게 세 명의 참된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런 친구는 우리가 직업을 잃었을 때, 자녀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배우자를 잃었을 때, 혹은 삶에서 어떤 죄절을 겪고 있을 때, 우리 곁에 있어줄 친구이다. 하지만 새벽 2시에 전화를 걸 수 있는 한 사람의 친구를 얻기는 어쩌면 더욱 어려울 수 있다.
사람은 절친한 친구를 갖기 원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또한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떤 이가 정말로 우리를 알고 나면, 우리를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걱정을 한다. 그래서 어떤 이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슬그머니 그에게서 물러선다.
우리에게는 인정, 즉 다른 사람에 의해 용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정반대 되는 것, 즉 우리가 다른 이들에 의해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거부되는 위험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 우리의 참모습을 아는 친구를 갖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뉴스, 스포츠, 날씨 같은 피상적인 수준의 대화를 유지함으로써, 서로의 약점을 다루는 압력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상처받고 있을 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우리를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가까움으로 인해 상처를 입지 않도록, 그와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적어도 한 명의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친구의 배반보다 더 깊은 감정적 고통 혹은 잔혹한 상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사랑 어린 직면으로 우정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신뢰, 솔직함,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참된 우정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이 그러하듯 우정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활동과 생각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우정을 얻기 위한 비용은 개인적으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 작동하려면 결국 솔직해져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서지기 쉬운 자아와 관계를 형성하는 복잡한 역학은, 참된 친구를 만드는 것을 어려운 일로 만들고, 제한된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친구를 갖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
1) 친구는 당신이 필요할 때 그곳에 있다.
영적 싸움에서 친구는 내가 볼 수 있거나 없는 적들과 맞서 나를 보호하도록 돕는다.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는 두 사람은 모든 방향에서 다가오는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도서 4:9~10)
2) 내가 궤도에 머물도록 돕는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이론과 개념이 옳다고 합리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더 나쁜 것은 이런 이기심과 오만함은 늘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친구가 나를 궤도에 머물도록 도울 수 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6,9)
3) 명료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나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 머릿속을 정리해보려 하면 할수록 근심만 생긴다. 나는 이럴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한다. 바로 그게 친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친구는 공명판 노릇을 함으로 나를 돕는다.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일관성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어떤 문제에 관해 상세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추론 방식으로는 할 수 없는 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명료하게 만들어준다. 말하기에는 생각하기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훈련과정이 들어 있다. 대개 옳은 답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할 때 저절로 알게 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4) 친구는 듣는다.
때로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에 공감해 주는 그 누군가이다. 종종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명한 조언이 아니라 현명한 공감이다. 말이 아니라 연민인 것이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모든 가치 있는 것이 그러하듯 우정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겉도는 수준의 교제를 넘어서려면 시간, 신뢰, 그리고 솔직함이라는 투자가 필요하다. 그에 대한 보상은 참된 친구를 얻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참된 친구를 원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그 첫 단계를 시작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