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전 8:00, 뉴욕 오후 7:00, 브리즈번 오전 9:00
내가 즐겨 보는 시계들이다.
"찬희, 찬유야, 잘 있었어? 오늘 하루 잘 지냈니?"
"엄마, 이제 곧 아침 먹고 놀려고 해."
"맞아! 그렇네."
둘째 딸의 두 아들들은 내가 일어날 때면 잘 시간이 되고 내가 자려고 하면 그들은 일어나 움직인다.
아이들이 좀 더 어렸을 때, 아침밥을 먹던 그들이 영상통화를 하면서 딸이 시킨 대로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말할 때, 아이들은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던 표정이더니만, 이제 6살, 4살이 되어서인지 이런 표현에 아주 능숙해졌다. 아이들과 통화하고 싶어서 때로는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아이들이 푹 자고 지금쯤 일어나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여 통화할 때면, 아이들은 생생한데 나는 졸려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 하고 끊을 때도 있다.
"아이고, 할머니 그만 자야겠다. 내일 출근해야 돼."
그래서 오늘은(7월 3일 토요일) 일찍 통화를 했다. (내가 오전 8시니까 거기는 저녁 7시, 아이들이 한참 놀 시간이야)
"아이들 있니?"
"응, 2주간 여름방학이라 오늘 세 명의 엄마들과 아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어. 지금 씻고 있는데 나오면 연락을 할게"
"에고. 피곤하겠다. 알겠어. 다 씻으면 연락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카톡을 보니 딸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엄마, 나도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졸았는데, 보니 아이들이 다 잠들어 있어. 내일 아이들 깨면 통화할게."
내일이면 미국은 토요일, 나는 일요일, 예배 때문에 바쁜 날이다. 마음의 여유에 차이가 있어 서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둘째 딸 가정과의 만남(영상통화를 통하여)은 언제나 먼저 때를 생각하고 기다려서 만나야 하는 만남이 되었다.
첫째 딸이 두 달 전, 즉 5월 15일 날 결혼식을 했다. 코로나의 산물인 영상 결혼식이다.
"브리즈번에서 오전 11시에 예식이 있으니까 엄마, 엄마 아빠는 한국에서 오전 10시에 줌으로 들어오면 돼. 1시간 일찍 줌을 열거니까 9시부터 들어와도 돼."
"그래, 알겠다. 혼자서 결혼 준비하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엄마,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 내가 동생처럼 미국에 있었다면 엄마는 한밤중에 줌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 그 말은 맞다. 오전 10시가 좀 이른 시간이지만 밤늦은 시간보다는 낫는구나. 친척들에게 그 시간에 줌으로 들어오라고 연락할게."
그날, 둘째 딸의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이모의 줌 결혼식에 참석을 했다.
첫째 딸과의 만남은 내 감정이 피어오를 때에 통화를 할 수가 있다. 어느 정도 살아있는 감정이 전달될 수가 있는 시간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첫째 딸도 자신의 가정을 가지고 있는 아이, 아무 시간에나 전화를 할 수는 없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전화 대신 문자, 특히 카톡 문자를 즐긴다.
메시지든 전화든 이를 받는 당사자는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본인은 지금 회사에서 일이 안 풀려서 잔뜩 화가 나고 짜증이 난 상태인데, 친구는 전화를 해서 어제 남편이 사 온 명품가방을 자랑한다고 하자. 차마 대놓고 "야, 그만해라. 나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아니거든." 하고 말하지는 못 하지만, 빨리 통화가 끝나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다른 핑계를 대고 서둘러 전화를 끊게 된다. 전화는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막바로 부딪히는 상황이라면, 문자는 부딪히는 장벽을 하나 제거하고 나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문자를 여는 순간 내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그 문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도, 나중 내 기분이 좋아졌을 때 그 문자를 다시 열어보면, 나는 내가 그 내용을 좀 더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간혹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화보다 문자를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당신 기분이 좋을 때 이 내용을 읽게 되기를,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시기를.'
이런 마음이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절당할 위험부담은 줄어든 대신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오는 위로와 공감, 기쁨과 슬픔의 공유라는 마음의 큰 울림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시대이다.
옛 글에 친구에 대해서 "아무 때나 찾아가도 나를 맞아주는 친구가 있어 좋다"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는 "아무 때나 전화해도 언제나 반갑게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 좋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화났을 때나 허전할 때나, 어느 때나 전화해도 함께 공감해주는 스펀지 같은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간혹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그분은 정말 언제나 나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심지어 "빨리 와서 나에게 말하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게 내려놓으렴"하고 나를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신다. 슬플 때는 위로해 주시고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해 주시고 화났을 때는 마음을 누그뜨러 주시고 허전할 때는 함께 있어주시는 진정한 친구, 참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 그분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거실 때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분과 둘째 딸처럼 시간대가 맞지 않거나 첫째 딸처럼 나 자신의 틀 안에 사로잡혀 그 음성을 듣지 못한다. 내가 그 전화소리에 민감하지 못하니까 때로는 비상전화벨을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얼마 전 남편의 큰 수술 전에, 넘어짐을 통해 비상벨을 발동하셨듯이 말이다. (브런치 글 "생각지도 않은 일") 그런데도 둔하여서 그 비상전화벨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나 나를 받아주시는 그분,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아침, 저녁으로 마음이 바뀌지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태 28:20)'고 약속하신 그분. 그분과의 전화통화가 좀 더 친밀하여지기를 요즈음 나는 소망하며 바라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