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그래서 인류가 선택한 방법이 교육이다.
인적 자원밖에 없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이 모두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해외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기도 했다.(2000년 7월 15일) 교육적 효과로 인해 일단 경제가 성장하였고, 과거보다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는 기회가 확대되었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 더 성숙된 인간이 되었을까?
즉 공의와 사랑이 흐르는 사람과 사회가 되었을까?
대학생 때 읽은 중국 연변의 근대화 물결에 대해 쓴 한 기사가 생각이 난다.
"근대화, 바람직하죠. 그러나 다 좋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물질에 눈뜨게 되고, 탐욕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지금의 순박한 연변 인심은 사라질 겁니다.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사건과 사고가 사회에 휘몰아칠 겁니다. 자본주의, 즉 물질이라는 수단이 사람을 이롭게도 하는 동시에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분명 "잘 살아보세"의 새마을 운동으로 더 잘 살게 되었는데 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일까?
예전에는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아서 우리 주변에 자식을 죽이고 내다 버리는 사건을 우리가 알지 못한 것일까?
왜 아이들은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지고 늘 바쁨과 피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이제 교육이, 물질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런던의 그리니치(Greenwich) 왕립 해군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국비 1기 유학생 옌푸는 푸저우 선정(船政) 학당의 교수가 되었다. 1879년의 일이다.
보통 지식인이 그렇듯 옌푸 또한 세상은 급진적인 혁명으로 바뀔 수 없으며 교육을 통해 차츰차츰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은 무지를 걷어내는 일이다. 옌푸는 시종일관 지식만이 모든 중국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서양의 지식만이 위기의 중국을 구할 수 있으니, 배격하지 말고 정신까지 서양을 배워 부강을 달성하자고 주장한다
옌푸는 "중국은 민품(民品)이 열악하고 민지(民智)가 비천하니 지금으로선 교육에 착수하는 것이 급하며 점진적으로 혁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쑨원에게 말한다.
그 서양의 지식이란 과학, 민주, 자유, 그리고 민권이었다. 동양에 없었던 이런 관념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리라 믿었다. 1898년 옌푸는 황제에게 장문의 상소문인 <만언서(萬言書)>를 올려 군사, 재정, 외교라는 '외부 개혁'과 더불어 인재 양성, 습관 개조, 인심의 변화 등 '근본 개혁'을 주장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구망결론(救亡決論)>이란 글에서 옌푸는 교육과 학문이 잘못되어 중국이 허약해졌다고 진단한다. 중국인의 지혜가 막히고, 마음이 나빠지고, 건달이 불어나 망하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상은 바뀌었는가?
전통을 버리고 서양의 교육과 학술로 완전히 바뀐 오늘날 중국인은 지혜롭고 마음이 건강하고 건달이 없어졌는 가?
오히려 돈 아닌 지혜는 막히고, 돈 때문에 마음이 더 나빠지고, 돈을 찾는 건달은 더 불어났다."
(장현근 용인대학교 교수의 사설에서 발췌)
교육은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사람의 모델을 제시할 수는 있는데, 이 형상들이 머릿속에만 있지 가슴으로 내려와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데는 부족함이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지식의 앝은 꾀를 발달시켜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남을 착취하는 교묘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물질은 많은 것을 가능케 했다. 물질이 주는 단맛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에 목을 매고 그 단맛을 빨아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자족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다다익선이라는 단어의 종이 되어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아귀다툼에 빠져들고 있다.
"어, 너 많이 바뀌었네. 옛날에 너 공부 좀 한다고 공부 못 하는 아이들 무시하고 잘난 체 하더군. 또 너, 너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학교에서도 자기 좋은 것만 하겠다는 얌체 같은 아이였는데. 오늘 보니 좀 바뀌었네."
오래전에 중학교 동창생이 나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학교 청소도 내가 제일 쉬운 곳을 하려고 했고, 내가 공부도 너보다 잘하니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돼먹지 않은 특권의식까지 가지고 있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도 생각난다. 동네에 같이 놀던 아이들이 8살이 되어 다 학교에 입학하니, 나는 부모님에게 떼를 써서 기어코 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당시 입학 연령층이 많아서 8살이 되지 않으면 입학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 이상을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지 않고 미루다가 한 달이 지난 후 7살이라는 것을 선생님에게 말한 잔꾀를 일찍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는 한 책상을 두 명이 함께 사용했는데, 나는 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다툼 끝에 내가 그 아이의 책을 집어던져서 책이 다 찢어지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너무나 놀라서 나를 쳐다보시던 그 눈길, 아마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 아니, 무슨 7살짜리가 요렇게 앙큼스러운 아이가 다 있어"라고.
나는 아주 몹쓸 사람이 될 뻔했다.
그러나 빛이신 그분을 만나고 나니, 나의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 9:9)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박효진)"라는 책 제목처럼, 나는 그 분의 빛 때문에 변화되었고, 요즘도 내 주위에서 그 빛 때문에 조금씩 고쳐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기애로 가득찬 사람이 남을 돌아보게 되고, 남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모습은 나를 더욱 깨어있게 만든다.
평소에는 엄청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돌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배려하며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생명으로 가득하여 생명을 나눠주는 그런 빛 된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그리고 나 자신도 점점 더 빛으로 변화되어 어둠을 밝히는 자 되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 분의 빛 가운데 있을 때에야만 가능하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