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의 첫 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없습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그 이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깊이가 없다고 수군거린다. 이 여류 화가는 깊이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이 추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신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았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고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갈기갈기 찢은 후 텔레비전 방송탑에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내리나, 강풍 때문에 타르가 포장된 광장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날려가 전나무 숲에 떨어진다. "그런데도 그녀는 즉사했다"라고 작가는 표현한다. (작가의 이 표현에서 '여류 화가는 엄청난 재능을 가졌으나 환경에서 나쁜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렇게 나타내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즉 방송탑에 올라가 떨어질 때 도로 위에 떨어진다면 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때 강풍이 불어 그녀를 전나무 숲에 떨어지게 했다.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인데도 '그녀는 즉사했다'라는 말은 주어진 좋은 환경이 그녀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나쁜 결과를 가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나는 해석을 한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똑같은 평론가는 그녀의 사후에 관점을 180도 뒤집어 그녀의 작품에서 삶의 깊이를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읽을 수 있다는 글을 쓴다.
그러면서 평론가는 그의 비평에서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라는 말로 작가의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즉 말 한마디로 인해 망쳐지는 이 여류 화가는 그녀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비극적인 인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세희야, 너 너무 종훈이의 말에 영향받는 것 아니야?"
"종훈이가 나에게 멍청이라고 했다고요."
"세희, 너 멍청이 아닌 것,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종훈이가 재미있어서 더 너를 놀리는 거야."
"아니에요. 종훈이가 분명히 저에게 멍청이라고 했다고요."
"너 종훈이가 장난하기 좋아하는 아이라는 거 알고 있지? 선생님도 종훈이에게 분명히 경고하겠지만, 너도 약간은 신경을 끄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세희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이다)
나의 학교의 세희도 어쩌면 은근히 세희를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종훈이의 말에 매여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세희에게는 남의 말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나에 대한 남들의 말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보아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도 한 때 그랬다.
교사 초창기에 "선생님, 수업이 재미없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지금 이 아이들이 나의 가르치는 능력이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
그래서 나는 뽀로퉁해져서
"야, 내 수업에 집중해 봐. 그리고 어느 선생님 수업이 재미있나 말해봐."
즉 집중하지 않아서 재미없는 것이니 너희들의 탓이고, 또 수업 잘하는 선생님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비교의식을 발동하곤 했다. 그리고는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와 애꿎은 남편에게 화를 내곤 했다. 그때의 나의 성향은 나를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까지도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 재미없을 수도 있지. 언제나 항상 수업이 재미있을 수는 없어. 그래도 여기 이 부분은 너희들이 재미있으라고 넣은 부분인데 너희들 기대에 못 미쳤나 보다. 아이고, 얘들아 미안하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 그리고 내가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점점 알아갈 때, 수업은 즐거워지고 내 마음의 평강은 유지되었다.
이 마음의 여유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삶의 연륜 때문일까?
주위를 되돌아볼 때 꼭 세월이 약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세가 드시면서 더 이상해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초, 나와 성향이 다른 남편과 나는 많은 다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왜냐하면 하나님이 짝지어준 아내이니까, "
그러면서 남편이 수시로 사랑한다는 말을 나에게 했다. 남편이 처음 이러한 말을 할 때, 나는 아직도 여러 가지 풀리지 않은 응어리 때문에 그 말들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말들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은 나를 강하게 하고 여유롭게 했다. 아이들의 어지간한 말에는 상처 받지 않는 마음의 방패를 둘러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아침, 저녁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런데 변함없는 사랑, 내가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나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웬만한 사람은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밖에 모르는 이 이기적인 인간인 나도 그분은 사랑하시고 품어주셨기 때문이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장 17절)"
그 여류 화가에게도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그녀가 힘들어할 때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해줬다면, 그녀의 예민하고 우울한 성향은 좀 변화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내 작품에 깊이가 없을 수도 있지. 그러나 아직도 작품을 할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고, 나는 점점 더 좋아지면 되지." 이런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비평가의 그냥 훅 던진 말을 발전의 기회로 삼지, 그 말에 매몰되어 자신을 학대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학교의 아이, 건우는 늘 밝다.
건우는 별로 공부를 잘하지도 못 한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내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중에서 건우의 멘토가 되어줄 아이가 있니?"
수업을 하다 보면 영어의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조금 도움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되었다. 그래서 멘토-멘티제도를 도입했다. 멘토 될 아이들의 양해를 먼저 구하고, 멘티들에게는 수업 후 5분간만 친구에게 그날 배운 수업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듣는 것이 어떠겠느냐고 설득을 한다. 물론 멘티들만 남겨진 상황에서 그들의 자존심이 상처 받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한다. 그들의 승낙을 얻은 후 멘토들을 소개하면서 이 친구들이 어떠냐고 또 묻는다. 이런 절차를 거쳐 멘토-멘티가 성립되면 나는 그들을 최대한 칭찬하고 격려한다. 그런데 그날 수업을 하다 보니, 건우를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건우에게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한순간 아이들이 다 침묵했다. 나는 일순간 당황하였다. 그러자 건우가 말했다.
"친구들아, 나 가르쳐 줘. 내가 잘 배울께."
나는 건우의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멘티들은 부끄러워한다. 그들만 따로 불러서 말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건우는 모든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당당하게 멘토가 되어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건우의 여유와 자신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음에 세희가 또 불평을 말하면, 나는 그 아이를 좀 더 따뜻하게 사랑해주어야겠다. 지금 세희에게 필요한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따뜻이 품어주고 지지해주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언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