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 사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옛날에는 명함을 많이 주고받았다. 그 명함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력을 아주 빼곡히 적어 놓은 경우가 있다. 즉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시시하게 보지 말라"라고 하는 듯이 그 빼곡한 글자들이 마구 고개를 쳐드는 것을 나는 느낀 적이 있다. 물론 요즘도 나는 간혹 명함을 받는다. 그 명함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경우, 언젠가 연락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나는 그 명함을 사진 찍어 보관하고, 솔직히 명함은 휴지통에 버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전화번호를 주고받을 때, 나는 먼저 그 사람의 카톡에 있는 프로필을 살펴본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은 용량이 너무 크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지면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꾸미게 되고 장식하게 되고 또 과장하게 된다.
어떤 한 사람에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딱 한평만 준다면 그는 꼭 필요한 것만 챙길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50평짜리 집을 준다면 그는 방방을 장식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나는 한 평의 집은 카톡의 프로필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은 50평 집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을 때는 그의 카톡 프로필을 보게 된다.
카톡 프로필에는 어느 정도 제한된 지면 때문에 (너무 많은 사진을 올리는 것은, 만약 본인이 사진을 저장할 목적이 아니라면 과유불급 같아 보인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장면이나 사람을 올린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 사람이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를 조금은 추측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카톡 프로필에 아무 사진도 없는 사람을 볼 때 나는 두 가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전혀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즉 '나는 나다'란 자신감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긴 한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텅 빈 화면을 보시고 나를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나는 나를 당신에게 보여줄 생각이 전혀 없소."라고 하는 것 같다. 모든 대화는 쌍방향인데 어쩐지 빈 공간을 향해 소리 지르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또 다른 생각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실 뚜렷이 없소. 나는 그냥 묻혀서 살고 있다오."라고 하는 것 같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존재인 그 사람이 예쁜 색깔을 덧입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나의 카톡에 저장된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프로필 사진은 자연의 풍경이다. 국내의 혹은 국외의 여기저기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Mother Nature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쉼과 평강을 준다. 이 분들은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 자연에게서 위로를 받는 소박한 분들이다.
자연 다음으로 많은 사진은 자녀들과 함께 한 사진이다. 눈에 넘어도 아프지 않은 것이 자녀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녀가 꽁꽁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필 사진은 부부가 함께 있는 사진이다.(물론 독신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자녀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화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넉넉해도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을 아이들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기가 쉽지 않다는 어느 교육학자의 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이 건전해야 그 사회도 건전하게 되고 나라도 든든히 서게 된다는 것이다. 가정의 화목이 모든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 가정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는 편이다. 그래서 프로필 사진에 부부가 함께 있는 다정한 모습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될 때면, 나는 왠지 안도의 숨을 쉬게 되고 그 가정에 대한 약간의 염려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260여 개의 카톡에 부부가 함께 있는 프로필 사진을 올린 경우는 20여 개도 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찌 날마다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부부의 삶이 될 수가 있으랴마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빤히 보여,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저리 숭숭 구멍 뚫린 상태로 살아왔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감사하기도 하는, 그래서 "잃어버린 한 조각(The MIssing Piece)"에서처럼 서로의 뚫린 부분을 메꿔주며 세월 속을 굴러온 삶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의 함께 함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인생의 비바람, 폭풍우 속을 함께 뚫고 나온 든든한 동지가 옆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진 많은 카톡 사람들에게서 활짝 웃으며 서로를 의지하는 부부의 사진들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라가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기를 소망한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이 그립듯이, 건전한 가정의 개념, 즉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정상적인 가정의 개념 대신에, 동성끼리도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는 ( 심지어 앞으로는 동물과도 남편과 아내의 개념을 적용할 수도 있는) 이상야릇한 건강가정 기본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이 시점에, 인류 고유의 가정, 종족보존의 기본 토대인 가정에서, 그 주축인 부부가 활짝 웃으며 함께 하는 모습은 작은 빛이 되고, 그 작은 빛들이 모여 점점 더 활활 타는 불꽃이 되어, 이 세상의 어둠을 불사를 수 있음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주위에 작은 빛들이 점점 더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들의 빛이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욱더 빛나기를, 때론 아름답게, 때로는 찬란하게!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편 12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