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씨의 점 하나 지우기

by 김해경

그 남자는 대학교의 킹카였다.

일단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목구비 일목요연하고, 좋은 학과에 다니고 있고, 게다가 그 도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자칭 지성적이라는 여자는 그의 학과를 들먹이며 그의 두뇌의 우수함을 좋아한다고 할 것이고, 세속적인 여자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집안 배경과 부를 좋아한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지성적, 세속적 어느 편에서나 사랑받을 조건을 갖춘 천운 아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대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자, 축하의 의미로 엄마는 미나 씨에게 빨간 투피스를 한 벌 뜨개질해 주었다. 긴 생머리를 느려 뜨리고 빨간 투피스를 입은 채, 미나 씨는 사람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몰려드는 곳인 중앙대로를 대학생활에 필요한 물품구입이라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싸돌아다녔다. 미나 씨는 눈에 띄는 자신의 청순함을 어쩌면 의도치 않게 그 거리의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적으로는 별로 부족함이 없는 미나 씨. 그녀는 좋은 대학의 괜찮은 학과에 합격함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 또한 괜찮은 편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라온 환경은 그녀의 자존심을 곧추 세우기에는 부족한 풀 죽은 와이셔츠 같이 구질구질했다. 평생 옷에 흙을 묻히고 땅을 파서 살아야 하는 농사꾼의 딸로, 도시 변두리의 긴 좁은 골목길 끄트머리의 허름한 기와집과 문 간에 매여져 있는 집 지키는, 역시나 흙투성이의 개는 그녀의 인생이 흙투성이로 변할까 봐 미나 씨를 불안하게 했다.


3월, 대학교 교정은 파릇파릇한 나뭇잎과 풀잎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삐죽 내밀고, 새내기들은 그들의 수줍음을 감추고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 얼굴에 억지웃음을 띄고, 재학생들은 새내기들이 몰고 온 새로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코를 벌름대는 모습을, 하늘에 뜬 태양은 기지개를 켜면서 힐끗힐끗 겹눈질 하는 달이다.


미나 씨에게는 우연을 가장한 부딪힘인지 유난히도 자주 부딪히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일목요연하다.


학교생활이 약간 적응될 때인 5월,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시점과 더불어 학교의 축제도 풍성한 꽃으로 만발하는 시기이다. 미나 씨는 그녀가 가입한 동아리의 가판대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판다기보다 동아리의 이미지를 팔고 있을 때, 그 남자는 미나 씨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저와 차 한잔 하실 수 있나요?"

미나 씨는 전혀 망설임 없이 "시간이 없는데요."

미나 씨의 심정은 '이 남자, 중앙대로에서 내 뒤를 쫓아오던 사람 아니야? 내가 널 어떻게 알고 차 한잔을 마신단 말이야. 너의 정체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남자는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은 듯,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뒤돌아선다.


얼마 후 같은 과의 친구가 킹카 한 명이 신입생들 사이에 떠 오르고 있다고 귀띔을 한다.

"누군데?"

미나 씨도 은근히 관심이 갔다. '그런 킹카와 한번 사귀어 볼 수 있었으면'하는 바람이 마음 한쪽 구석에서 희미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런 아이였어? 지금은 머리가 길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옆 학과의 여자아이와 사귀고 있다고?"

미나 씨의 눈앞에 키가 큰 그 남자가 휙 지나간다. 미나 씨의 심정은 '그 미친놈, 자기 정체를 좀 밝히고 차를 마시던가 무언가를 하자고 하지, 무턱대고 차 한잔을 마시자고 하니 내가 자기를 알께 뭐람. 좀 아깝네. 걔가 킹카였어?"


시무룩한 미나 씨의 표정을 보고 뜨개질하던 손을 멈춘 뒤 엄마는 말을 걸었다.

"미나야.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응. 아냐. 그런데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스캔할 수 있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어. 그 기계를 그 사람의 신체에 쓱 스치기만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쫘르륵 뜨는 기계 말이야."

"그럼 미나에 그 기계를 가져다 대면 이렇게 뜨면 좋아?

박미나. 나이 19세 00 대학교 영문과 1학년. 아버지는 농사꾼. 어머니는 가정주부. 말썽쟁이 남동생 1명. 미래에 유능한 작가가 되기를 꿈꿈."

"아, 엄마! 그건 아니지. 박미나. IQ 131. 키 157. 청순하고 예쁨. 밝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재원임."

"아이고. 우리 미나 프로필은 좋은 것만 쏙 집어넣었네. 그래, 그 기계를 누구에게 갖다 대기를 원해?"

"응. 얼마 전에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남자가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서 한방에 뻥 차 버렸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 걔가 우리 대학교의 킹카라는 거야. 내참. 영 기분이 안 좋더라고. "

"미나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가진 배경을 차 버린 것이네. 우리 딸의 마음에 든 그 배경이 뭐였어?"

"엄마. 배경도 사람을 만들어. 우리 도시의 유명한 사학재단 알지? 그 재단 이사장의 아들이래. 좋은 학과에 다니고 있고, 그 남자의 아버지가 우리 대학교 경제학부의 교수라고 하던데? 괜찮은 집안의 부잣집 아들, 그리고 괜찮은 외모, 스마트한 두뇌. 이만하면 거의 완벽한 인물 아니야?"

"그래? 그 남자애의 성이 뭐라고 하던?"

"엄마. 왜 그래? 목소리가 갑자기 왜 떨려? 엄마도 이 남자애를 놓친 것이 안타까운 거야?"

"미나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성이 뭐래?"

"지형민. 지형민이라고 하던데."

"그래?"

엄마는 뜨개질 꾸러미를 주섬주섬 챙기시더니만 방으로 들어가 버리신다.


미나 씨는 안방의 벽 한 면을 터서 만든 다락을 좋아한다. 어릴 적에는 동생과 숨바꼭질하는 장소로, 화나면 엄마, 아빠를 피해 마음껏 울 수 있는 장소로, 이제는 미나 씨의 잡동사니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보물창고로 애용되고 있다. 창문을 뚫고 어렴풋이 자신을 드러내는 햇살 때문에 이 다락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밝음과 어둠을 반반씩 공유한 채, 언제나 팔 벌려 미나 씨를 반기는 엄마의 품 속처럼 아늑한 곳이다. 킹카를 차 버렸다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며칠을 미나 씨는 이 다락에서 뒹굴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지칠 때마다 끌적 거린 글들을 읽으며 웃기도 하고, 엄마의 처녀 적 사진첩을 오래간만에 뒤적거리면서 엄마의 섬세한 얼굴선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는 세월의 횡포를 탓하기도 했다.


"어어어? 이 사진 뭐야? 이 사진이 왜 여기 있어?"

미나는 엄마의 사진첩을 들고 엄마에게 뛰어갔다.

"엄마. 이 사진이 왜 엄마 사진첩에 들어가 있어? 엄마가 그 킹카를 알아?"

비록 약간 빛바래 있지만 분명 미나 씨에게 테이트를 신청한 그 남자의 사진이다.

"미나야. 너의 학교의 그 킹카라는 남자가 이렇게 생겼어?"

"응. 엄마. 똑같애, 똑같아."

"그래?"

엄마는 시큰둥하게 말한다.

"엄마. 말해봐. 지금 그 남자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이 사진이 왜 엄마에게 있어?"

"음. 별일 아니야. 옛날에 엄마가 아는 사람의 사진이야."
"와~ 그런데 이렇게 닮은 수가 있나? 혹시 우리 학교의 그 킹카가 엄마가 아는 사람의 아들이야?"

"음. 아마 그런가 봐"

"엄마.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이게 왜 아무 일도 아니야. 말해줘 엄마. 제발."


미나 씨는 어릴 적 엄마의 치마끈을 붙잡고 먹고 싶은 것을 사달고 떼 써던 철부지 때처럼, 그날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 사진에 대해 말해달라고 졸라댔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측량기사였어. 꽤 많은 돈을 벌었지. 그때 같이 동업한 사람이 지형민의 친할아버지야. 두 사람은 함께 하면서 의형제처럼 사이가 좋았지. 형민이의 아빠는 엄마보다 2살 위였어. 두 집안이 자주 만나다 보니 우리도 아주 친하게 지냈지. 외할아버지와 그쪽 집은 나와 형민이의 아빠를 장차 결혼시킬 생각으로 아예 어릴 적에 약혼까지 해 놓자는 말까지 오고 갔지.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가 생겼어. 외할아버지와 형민이 할아버지는 함께 동업한 많은 돈을 가지고 사학재단을 하나 샀어. 외할아버지가 잠시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다녀온 뒤 보니, 그 사학재단이 형민이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등록이 된 거야. 큰 싸움이 벌어졌지. 외할아버지의 괄괄한 성격, 너도 알지? 이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하다 보니 두 집안이 원수가 되었어. 형민이 할아버지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외할아버지는 배신감에 억장이 무너져 이년 뒤 돌아가셨어. 나와 나보다 어린 너의 외삼촌, 그리고 집안일밖에 모르는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형민이 할아버지 간에 어떤 금전적 거래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어. 우리는 이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어. 그때 가장이 없는 우리 가정을 도와준 사람이 너의 아빠야. 지붕수리도 해 주고 텃밭 가꾸는 법도 가르쳐 주었지. 너의 아빠는 고마운 사람이야. 건강하고 신실한 젊은 농사꾼이었지. 너의 아빠의 도움으로 우리 세 식구는 근근이 살아갈 수가 있었어. 그래서 결혼한 거야. 나는 아직도 너의 아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어. 연이은 외할머니의 장례식도 다 아빠가 도맡아서 했지."


미나 씨는 초등학교 시절, 가정환경 조사서를 쓸 때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어머니는 고등학교 란에 체크해야 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그래서 혼자 합의한 결과 중학교 때부터는 아버지, 어머니의 학력난에 둘 다 고등학교로 체크한 자신이 생각났다.


지형민은 대학 4년 내내 여러 소문을 퍼뜨리며 킹카의 자리를 유지했다. 몇 번째 여학생을 바꾸었다느니, 지금은 어느 학과의 어떤 여학생과 사귀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나 씨의 귀에도 들려왔다. 미나 씨는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떫은 감을 씹는 기분이었다.

"이 도둑 놈의 집안아! 너의 할아버지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 미나 씨는 지형민의 얼굴을 맞대고 하고 싶은 이 말이 언제나 혀 밑에 빙빙 돌고 있는 것을 모래알 씹듯 되씹곤 했다.


대학 졸업 후, 미나 씨는 중학교의 영어교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야누스의 다락에서 글을 끌적 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미나야. 드디어 지형민이가 결혼을 한대."

"그래? 결혼에 성공한 여자는 어떤 여자야?"

"왜 국문과의 말라깽이, 하지만 엄청 멋을 내던 여자애 있잖아. 여자 쪽 집은 평범한 가정인가 봐. 그래서 그 집에서는 난리 났나 봐. 결혼 잘한다고. "

"그래? 뭐, 잘 됐네. 그래야 계층이동도 이루어지고 사회가 균등화 될 수 있으니까. 그 킹카가 생각보다 평범한 여자애를 골랐네."


미나 씨는 지형민이의 그 잘난 체 함에 속이 더 뒤집혔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특권! 구태어 상대의 조건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너의 조건들, 나에게는 필요치 않아. 그건 여자를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치사한 놈들의 계책이지. 여자는 그냥 내 마음에 들기만 하면 돼. 오히려 얼토당토않은 조건이 나를 더 돋보이게 하지. "와~ 다 가진 놈이 저런 여자를 선택해? 세상의 가치와 정말 다르네. 속물이 아니구먼. 엄청 괜찮은 놈 아니야?"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겠지. 살아가는 차원이 다른 거야. 너희들과 나는. 이 여자는 평생을 나에게 고마워할 거야. 나는 그녀에게 유리구두 신발을 신겨준 왕자거든. 그녀는 신데렐라. 멋진 연출이 아니야?'


그 후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걔가 죽었데. 교통사고로"

오래간만에 걸려온 친구로부터 그 킹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나 씨. 얼른 핸드폰을 들고 다락으로 들어가면서 미나 씨는 엄마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다. 딸에게 꽁꽁 숨겨온 마음을 털어놓아서인지, 요즈음의 엄마는 가끔씩 짓던 슬픈 표정이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 늘 몸이 아파 누워있던 엄마는 아마 그때 마음이 아파 누워있었던 건지, 미나 씨가 대학 들어가고 나서, 아니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부터 훨씬 건강해진 모습이다. 미나 씨는 킹카의 죽음 소식에 마음 한쪽 구석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안도의 숨이 또한 내쉬어졌다. 마치 목이 탈 때 마신 뜨거운 물 한 잔이 시원하면서도 아쉬움을 남기듯이.


인생에는 무수한 점과 선과 면, 공간들이 어지러이 펼쳐져 있다. 단지 점으로 한 순간에 끝난 만남. 선으로 얼마 동안 이어진 만남, 면으로 어느 정도 공유되지만 또한 어느 정도 단절된 만남, 공간으로 계속 이어지는 만남이 있다. 엄마의 그 선의 만남, 엄마의 마음에 쭉 그어진 그 상처의 만남은 이제 아물어진 것 일가? 미나는 오늘 슬프게 빛나던 한 점을 지우면서, 엄마와 자신을 매고 있던 그 인연의 줄을 끊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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