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by 김해경

"미나 씨, 계약서에 도장 찍으러 오세요."


미나 씨는 전화를 받고 2층 사무실에서 계단을 내려가 인사과로 향한다. 이 회사에 발을 붙인 지가 어느덧 10년 6개월. 이제 6개월만 더 다니면 계약 완료가 된다. 강산이 한번 변할 시간이 흘렀지만, 미나 씨에게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았다. 은은한 미소가 아름다웠던 미나 씨였지만 10년의 세월, 그 풍파에 깎여 미소는 반쯤 얼어붙어 있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머리카락은 염색과 파마를 거듭하면서 추수 후 마당에 버려진 지푸라기처럼 부스스하게 제멋대로 곧추서 있고,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감 있게 상대방을 직시하던 시선은 어느덧 먼 옛날 초가집 굴뚝에 아물아물 피어오르던 연기처럼, 상대방에 대한 시선을 어눌하게 함으로 본심을 감추는 눈치 보는 사람으로 전락해 있었다.


간혹 미나 씨는 이런 자신이 혐오스러울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괜찮은 대학 떳떳이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의 사업은 결혼 후, 봄날 꽃망울이 터지듯 확장세로 돌아섰고, 미나 씨는 앞으로의 인생이 꽃길만 걸을 것 같아 하루하루가 즐겁고 흥분되었다.


"아니, 미나 씨. 회사에 놀러 오는 것 아니죠? 무슨 일을 이렇게 해 놓았어요?"

회사에서 아랫사람을 못 살게 굴기로 유명한 이 부장이 미나 씨를 불러 이렇게 말했을 때, 미나 씨는 자신의 꽃길에 흙을 뿌리려는 이 부장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았다. 소비자 표본조사를 작성하면서 미나 씨가 잘못 입력한 숫자 때문에 통계치에 약간의 오차가 생긴 것이고, 이 부장은 지금 회사의 신뢰를 받고 있는 미나 씨를 한번 물어뜯고 가야겠다는 심산으로 그녀에게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정하면 되는 사안이다. '정정 부탁한다'라고 하면 되는 사안을 '놀러 오느냐'라고 조롱하는 이 부장이 얄미워졌다. 그래서 이 부장을 갈는 심정으로, 한편으로는 회사를 그만둘 핑곗거리를 제공해서 잘됐다는 심정으로 미나 씨는 회사에 사표를 집어던졌다. 회사에서는 부사장까지 나서서 미나 씨를 만류했지만, 미나 씨는 훤히 보이는 자신의 꽃길에 누구의 훼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오만함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회사의 동료들은 몇 갈래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했다.

"미나 씨가 부러워요. 붙잡는 회사를 뿌리치고 나갈 수 있는 용기! 대단해요. 그런데 그게 다 미나 씨 남편의 사업이 번창 일로에 있어서 생계에 아무 걱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미나 씨의 그 환경이 더 부러워요."

"미나 씨, 대단해요! 그 못된 이 부장, 이번에 단단히 혼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회사에서 인재를 놓치게 만들었다고 이 부장을 이번 인사진급에서 배제했다는 소문까지 있더라고요. 진작 미나 씨 같은 사람이 이 부장에게 브레이크를 한번 걸었어야 했는데. 미나 씨가 그만두면서 큰 일을 한 것 같아요."

"아무리 이 부장이 마음에 안 들어도 미나 씨가 너무 경솔한 것 아닌가요? 비록 지금은 인생이 풍족하다고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이 들어오기 힘든 회사를 그렇게 휴지조각 같이 내치다니. 정말 인생이 어떤지를 미나 씨가 알고나 있는지 좀 걱정이 되어요."


미나 씨는 퇴사 후 어느 정도 회사의 영웅이 되었고, 그녀는 이제 여유롭게 골프를 배우러 나니며 인생을 즐기는 YOLO가 되었다.


이 세상에 한결같은 것이 어디 있으랴! 아침, 저녁이 바뀌듯이,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인생도 변화무쌍하게 자신을 바꾸며 자신의 살아있음을 과시한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죽은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자신을 대접해주기를 바란다.


미나 씨에게도 인생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부각했다. 남편의 회사는 불이 나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사그라졌으며, 남편의 과도한 스트레스는 뇌졸중을 일으켜 남편의 오른쪽 손에 마비를 가져왔다. 생계전선에 내몰린 미나 씨는 그전 회사의 절반도 되지 않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취업했고, 10여 년이 지난 회사의 모든 시스템은 컴퓨터화되어서 미나 씨에게는 모든 일이 생소했다. 취업 후 미나 씨는 초보단계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배우기 시작해야만 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무실 일을 돕는 어린 아가씨에게 잔소리를 들어가며 컴퓨터 작업을 배울 때마다, 미나 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옛날에 좋은 회사에 다녔었다는 그것 하나가 회사에서 미나 씨의 존재감을 지켜주는 유일한 바탕이었지만, 같은 사무실의 부장은 '나이 많은 사람을 뽑아준 것만 해도 회사에 크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을 늘 은근슬쩍 하곤 했다.


그 설움의 세월 10여 년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미나 씨의 모든 젊음을 먹어버렸다. 옛날의 그 당당하던 미나 씨는 매미가 허물 벗듯 미나 씨를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졌고, 미나 씨는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에도 감격하는 쪼그라든 풍선처럼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인생을 어찌 되었든 경제적으로 지탱해주던 이 회사를 6개월만 다니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미나 씨에게는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 건강하고 일을 잘할 수 있어. 이제 일에 익숙해서 지금 맡은 일을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만두어야 된다니--'


미나 씨는 세 군데에 도장을 찍고 계약서를 들고 나왔다.

"2023년 2월 28일 계약 완료"

"응?"

계약서를 훑어보던 미나 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2022년 8월 31일 계약 완료"로 알고 있던 미나 씨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사장님, 저 언제 계약 만료인가요?"

"내년 8월 31일이지 않나? 그런데 뭐 회사에서 좀 더 연장할 수도 있지."

"그래요?"

미나 씨는 작년 5월에 사장님과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났다. 올해 초에 회사를 장남에게 연계하고 그만 두신 회장님. 평소에는 미나 씨에게 별 관심도, 보살핌도 없던 분이 회사를 은퇴하시면서 미나 씨에게 큰 선물을 하신 것이다. 미나 씨는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여보, 이 계약서 좀 봐요. 계약이 6개월 연장되어 있어."

"어디 어디? 정말이네! 왜 미리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정말 기쁜 소식이네."


남편은 자신이 생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늘 미안해하면서, 또 앞으로의 생계가 막막하여 걱정이 태산 같은 이 시점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이 종이 한 장이 너무나 고마워, 아내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오늘 금요일 저녁이니 어디 맛있는 것 먹으며 기뻐합시다. 당신 오늘 뭐가 먹고 싶소?"


미나 씨는 그 옛날 꽃길을 밟던 시절 자주 찾았던 일식 전문집을 정말 오래간만에 남편과 함께 찾았다. 십수만 원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6개월 연장이면 거의 1200백만 원의 수입은 보장되어 있으니 이 정도의 자축을 과한 소비로 몰고 싶은 생각은 오늘 하루만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미나 씨는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아서 너무 기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뒤척대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요즘 시골의 엄마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았어. 한약이라도 지어서 좀 드셔야 하는 것 아니야? 그동안 여유가 너무 없었는데, 앞으로 1200백만 원이 보장되니 이참에 엄마에게 돈을 좀 부쳐드려야겠어.'

미나 씨는 벌떡 일어나 50만 원을 엄마에게 송금을 한다.


'그래서 인사과장님이 금요일 점심시간에 지나가시면서 나를 보고 웃으셨나? 과장님은 이미 계약 연장을 알고 계셨던 거야. 그래, 내일 마트에 가서 회사 사람들에게 돌릴 음료수를 사야겠어. 헤어지기 싫었는데, 다시 6개월을 더 회사 사람들과 같이 있게 되었다니, 너무 기뻐!'


'옛날 사장님에게 선물을 드려야겠어. 뭐가 좋을까? 지난 10년간 나에게 뭐 해준 것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이번에 큰 선물을 하셨으니, 시시한 것은 안 되고. 그래 한우 명품세트를 보내드리자. 주소를 모르니 '카톡 선물하기'로 보냄 되겠구나. 와! 가격이 만만찮네. 뭐, 이번 한 번이니까 이 정도야. 아니지. 다음 추석, 다음 설까지 내가 이 회사에 있는 동안은 과일이라도 보내드려야겠어.'


미나 씨는 밤새도록 뒤척대다가 토요일 아침 6시 40분에 옛 사장님께 카톡으로 선물을 보내었다. 얼마 후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라는 답장이 '까똑'하고 온다.


월요일, 미나 씨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부서별로 음료수를 나누어 드린다. 사람들은 '무슨 일로?' 하는 표정으로 음료수를 받는다.

"3월, 새 봄이 왔잖아요. 모두 힘내어서 열심히 일해요!"


미나 씨는 인사과에 들려 일찍 출근한 미스김에게 음료수를 주면서 말한다.

"미스김, 나 계약이 연장되었어"

"올 8월 31일이 아닌가요?"

"아니야. 내년 2월 28일로 되어 있던데. 이 음료수 과장님, 계장님 오시면 드려."


미나 씨는 모든 회사 사람들에게 화사한 봄기운을 불어넣은 자신이 대견하고 기뻐, 즐거운 마음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그때 컴퓨터의 사내 대화창에 인사과 계장님의 대화가 휘리릭 들어온다.

"죄송해요. 제가 계약날짜를 잘 못 적었어요. 다시 내려오실래요?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 놓았습니다.


미나 씨, 계약서에 도장 찍으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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