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는 눈앞에 펼쳐진 대기권 세계를 관찰합니다.
대기권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공기를 비롯한 각종 입자들이 밀도를 채우고 있습니다.
밀도는 태양-달-지구가 운행하는 '순리를 따라 흐르는 순환'이 있습니다.
낮과 밤, 날씨와 계절의 순환은 '대기를 데우거나 얼리고, 건조하거나 습하게 하면서 밀도를 변하게 합니다.'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그 물리세계는 관찰자가 무엇을 관찰하는지에 따라 엉뚱한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오래전 한 관찰자는 '공기를 그리겠다'라는 말을 해서 기괴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창시한 '선 원근법'은 사물의 크기 조절을 통해 '원근을 평면에 그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법에는 빛, 입자, 밀도에 관한 정보가 없어서 '공간감 표현이 어려웠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대기를 '빈 허공'이라 믿고 있었지만, 관찰자는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을 거라' 확신했고, 대기를 채운 '공기를 그리겠다'는 말로 그의 확신을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빛'이 '공기 입자'와 '밀도'에 반응하며 여러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선 원근법의 한계'를 넘어서 '원근감에 더해 공간감까지 평면 회화로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기법을 '공기 원근법'이라 하며, '선 원근법의 기하 원리'가 이미 체계를 갖추었고, 다양한 연구활동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선 원근법'에는 '멀어질수록 작아진다'라는 명제가 있는데, '공기 원근법'은 그에 더해 '멀어질수록 흐려진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추가했고, 또한 '멀어질수록 고유의 색조가 변하며 옅어진다'라는 것도 추가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공기를 그리겠다'라고 말할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습니다. 그러나 거의 20년이 되어갈 때쯤, 그의 작품 '모나 리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실없게 들렸던 그의 말이 현실이 된 것'을 알았고 감동에 휩싸습니다. 그의 그런 창의적인 발상에서 창시된 공기 원근법은 '대기 원근법', '색채 원근법'이라고도 합니다. 라틴으로는 'Sfumato' 스푸마토입니다
선 원근법이 '사물의 크기 비례를 조절하는 기하학의 연장'이라면, 대기 원근법은 '빛과 색채의 자연과학'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즉, 대기 원근법 이전의 화풍에서는 멀리 있는 사물을 작게 그리면서 '원근감'은 살렸지만, 그러나 '원근에 맞는 입체-공간감 표현'은 '그 관찰자'가 시도하기 전까지는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후배 화가들이 '원근법에 더해 입체-공간감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며 작품을 남겼지만, '아직 빛은 그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밝은 면에서 풍성한 중간 톤과 정밀한 묘사'는 있었지만, '어두운 영역과 밝은 영역을 나누는 경계선'을 그리거나, '어둠 영역과 그림자 영역에서의 섬세한 표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림에는 '빛의 방향성'과 '질량의 무게감' 표현이 어려워 그림이 대체적으로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의 궁극적인 열망, 즉 '현실적인 입체감과 공간감'을 살리는 데 있어서는 '빛'을 그려야만 했습니다. '빛을 그린다'는 말은 곧, '밝은 면의 흐름과 어두운 면의 흐름'이 나뉘어 흐르도록 그리는 것이며, 그 흐름이 그림자로 이어져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공기의 흐름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에서, '피렌체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자연철학과 과학'이 유럽에서 급성장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다방면의 천재가 등장해 거의 모든 학문 영역을 섭렵하며 그 지식을 미술에 접목시켰습니다. 그는 '빛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자연광, 직사광, 반사광' 등을 분류했고,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에서는 '빛의 방향성을 살리기 위해 '어두운 면의 흐름'과 '그림자 방향'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최초로 빛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 천재성이 돋보이는 여러 시도들에 의해 '선 원근법의 결핍'이 점점 보완되었고, 이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이 그들의 작품에서 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표현 기법들'을 발전시켰습니다.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을 보면, 얼굴, 목, 어깨, 손에서 '나뉜 어둠의 경계선'과 '그림자 방향'을 선명하게 살림으로 화면 우측에서 빛이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선 원근법 & 대기 원근법 비교
둘 다 1점 투시도이고 구도도 비슷한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비교하면서 '선 원근법'과 '공기 원근법'의 차이를 살펴봅니다. 두 그림의 제작연대 차이는 겨우 30년 정도이지만, '공간감과 입체감의 표현력'에 있어서는 너무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페루지노의 그림'은 그림으로 보이지만, '아테네 학당'은 현실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차이를 살피기 위해 '페루지노의 그림'을 먼저 보면, 배경에서 '소실점에 의한 원근감'은 있지만, 건물의 색상과 묘사정도에 의한 '선명도' 표현에는 '원근 차이가 없습니다.' 인물들에서도 근경이나 중경 인물의 선명도 차이가 없어서 '전체적인 공간감'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공간감 표현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빛을 실제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모든 건물과 인물들은 '좌측에 광원을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는 설정'으로 그려졌습니다. 그것이 그 실제감을 떨어뜨리면서 그림 같은 그림이 된 것입니다. [이런 판단이 없는 그의 작품성은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리고, 두 그림 모두 인물들이 가로로 길게 배열되어 있는데,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인물들의 배치에서부터 '원근감'과 '공간감' 그리고 '현실감'을 잘 드러내기 위해 아주 효과적인 구도를 잡았습니다. 그 구도는, 인물들이 대략 5개의 군집을 형성하고 중간중간 연결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물들의 외형 특징'과 '크기 비례'도 다양하게 설정했습니다.
또한, 인물들의 겹침에는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은 역시 빛 방향을 부각하는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인물들 각자가 광원을 하나씩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광'이 전체 배경과 인물들에 자연스럽게 비치도록 설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인물과 배경 전체에서 '색상과 선명도'를 원근에 맞게 그렸다는 것입니다. 배경을 보면, '근경의 바닥', '중경의 벽면과 천장', '원경의 천장, 벽면, 하늘' 묘사가 각각 원근에 따라 '점점 선명도가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계단을 넣어 높낮이 차이에 의한 '공간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기간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30여 년 만에' 평면회화에서 그만큼의 급진적인 성장을 보인 것을 지나온 역사에 비추어보면, 몇천 년이 넘는 세월을 단축시킨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이 있습니다.
'선 원근법'과 '공기 원근법'의 구분을 명료하게 보이기 위해 입방체에 비친 빛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두 예시의 차이를 모르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차이가 보인다면, '원근감과 공간감의 차이'를 보는 것이고, '입체감과 현실감이 '빛'을 그리는데서 완전해진다'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원근감'은 거리 차이가 표현되는 것이고, '공간감'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공기의 흐름이 있는 것이며, '입체감'은 빛이 나눈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의 흐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근감, 공간감, 입체감이 모두 원근에 맞게 그려질 때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입체감에서는 다시 '평면적 입체감'을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빛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물의 명암을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입체감은 누차 언급한 대로 빛을 그리는 것입니다. 즉, 스푸마토 기법의 창안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평면회화에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공기가 흐르고, 빛의 방향이 뚜렷해졌습니다. 그 결과 평면에 공간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진보가 중요한 이유는, 이전에 없었고 상상할 수도 없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술 교육'에는 데생[Dessign], 우리 말로는 '소묘 과정'이 있습니다. 연필, 지우개 또는 목탄으로 입방체, 석고상, 정물 등의 하얀 사물에 비친 빛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훈련입니다. 그 과정의 처음은 '선 원근법'이고, 끝은 '공기 원근법'입니다.
빛의 광채에는 '색 속성'이 있지만 색은 볼 수 없고, 색상을 가진 광자가 '대기권의 입자와 사물의 원자들과 만나 산란' 되어야 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색광'이라는 짧은 파장의 광자가 '대기권 겉 표면층'에서 산란을 일으켜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사람과 태양 사이의 대기층이 두꺼워 대기 표면층에서 산란하는 푸른색은 옅어지고, 파장이 긴 '적색광'의 산란은 선명해지기 때문에 붉은 노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빛의 색 속성'이 '대기 원근법'과 같은 범주라서 '공기, 대기, 색채 원근법'이 한 이름이 된 것입니다.
예시의 좌측 산처럼, 중경까지는 고유색을 잃지 않지만, 원경으로 넘어가면 그만큼 공기층이 두꺼워져서 '대기의 색'에 점점 물들게 됩니다. 초록색이든 붉은색이든 공기층이 두꺼워져 밀도가 높아지면 '흐리고 푸른 색조로 변한다는 것'이 '색채 원근법'입니다.
그런데, 흐리고 푸른 색조로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빛의 가시광선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 색의 광자들이 있는데, 그 각각은 서로 파장의 길이가 달라서 환경 변화에 따라 대기의 색이 천차만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대기가 습하거나 건조하거나 미세 먼지가 많거나 적거나 하는 등의 환경적 이유들로 색은 달라집니다.
그런 체계들을 하나 둘 쌓다가 보면 '관찰력'이 좋아진 것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관찰에 대해 조금 언급해 보면, 예시 그림이 낮이란 것은 당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낮 시간대 중 몇 시쯤 인지는 금방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면, 화면 좌측 30º 높이쯤에 있는 것으로 관찰됩니다. 이는 계단 난간의 그림자와 산 그림자를 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의 색이 연 초록이 아니라 짖은 초록이라서 봄은 아니고 늦여름쯤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대를 추측하자면, 늦여름의 일몰 시간을 저녁 7~8시 사이로 보면 그림의 시간대는 대략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런 조건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그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꿈속에서 본 풍경'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서 그렸는데, 그려 놓고 보니 그런 조건들이 갖춰진 것입니다. 때문에 그림을 그린 당사자 이면서도 완성된 그림을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계절이나 시간대 같은 것들에 대한 분석도 하게 됩니다. 그런 습관은 그림을 보는 안목과 함께 자연과 풍경의 미적 원리들도 관찰하게 합니다. 선 원근법, 대기 원근법도 관찰력에서 태어났는데, 그 원리는 너무 일상적이고 당연한 어떤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