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by Tony C

'결핍'이라는 단어가 사전적으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어떤 것이 없어지거나 부족한 상태'라고는 하는데, 그 의미만 보면 '인간적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대체로 생존과 직결된 '경제 또는 건강 문제들'에 있어서 만큼은 '인간적 의지나 노력'으로 채워지거나 회복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드물다기보다는 오히려 '한번 결핍에 빠져버리면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는 믿음'까지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결핍에 찌들어 살아온 인생에게는 '본인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된 절망', 그것이 '결핍의 실제 의미'입니다.


옛 조선에서 대대로 노비로 살다 간 이들에게 '신분의 벽'은 이 땅을 떠나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일제 치하, 한국 전쟁, 독재 정부를 거치면서 뺏으면 뺏기고, 때리면 맞고, 그렇게 죽임 당하면서 견디기만 해온 선조들에게 그 시대적 상황은 국외로 탈출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이어온 우리의 조부모, 부모님들에게 내가 만약 '왜 그렇게 힘없이 사셨어요'라고 하면 나는 돌 맞아 죽어도 싼 후손입니다.

오랜 시간 온갖 수술을 반복하며 병실을 떠날 수 없었던 이에게 건강한 육체는, 절대 본인에게만큼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혹시, 그런 이에게 '당신이 믿음만 가지면 일어서서 건강한 일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하는 이가 혈과 육이 있는 인간인 이상 그는, 사람의 영혼을 괴롭히는 사기꾼일 뿐입니다.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지만 너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한 친구는 자신의 재능과 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보다는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혹시 돈 많은 어떤 친구가 '난 네 재능이 부러워'라고 말하면 싸대기 맞기 쉬울 텝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도 결국 죽을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아니야!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어!'라고 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화조차 내지 않습니다. 그냥 미친놈 취급하고 맙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그 '결핍이 죽는 순간까지 지속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의 인생'입니다.


그나마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찬받는 이는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서 또 다른 성취를 일구어 내는 이들'입니다. 마치, 한국 전쟁 후, 당시에는 비록 이 나라가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반도체를 만들게 될 것이란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을 테지만, 그 세대는 결국 하나 둘 성취하면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강국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수백 년을 노비로, 천민으로 살아온 이들의 후손은 선조들과는 달리 제 목소리 당당하게 내며 살게 되었고, 가난은 극복하면 그만이라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성취들로 인해 젊은 시절, 문 앞에 내놓은 배달음식을 몰래 먹던 한 친구는 지금 큰 부자가 되어 잘 살고 있습니다.

과거 의료기술도 열악하고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에 병원은 일부 부자들에게는 유익했을 테지만, 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살려고 들어갔다가 몸은 죽고 가족에게는 빚만 안겨주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복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한 연로한 어떤 이는 건강이 악화되자 산삼도 사 먹고, 국내 최고 의료진의 치료를 받으면서 여전히 잘 살고 있고, 어떤 이는 심장이식까지 받아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와 같이 '결핍을 극복하는 대단한 의지와 성취'가 우리들의 일상에 흔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가난에 찌들어 살아온 한 친구는 아직도 그 가난을 극복할 의지를 가지지 못한 채, 몇 번인가 죽으려 시도했다고 합니다. 병실에 있던 친구는 이식 수술을 몇 주 남겨두고 그만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죽음'이란 것이 어떤 이에게는 현실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도피처가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나중에 죽더라도 지금은 피하고 싶은 것이 되면서 '죽음이라는 벽'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맙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결핍이 된다는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즉, '죽음'에게 '탄생이라는 것이 결핍'이 되고, 탄생의 지속이 끊어지면 '영원한 사망'만 남습니다. 반면, '탄생과 삶'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결핍'이 되고, 사망이 생명에게서 분리가 되면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생명은 죽음 앞에 무릎 꿇어왔기 때문에 '사망'은 '사람의 의지나 성취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현실이 곧, '결핍에 찌들어 살아온 이들의 맹신'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사망에게 있는 결핍' 즉, '생명이 가진 영원'은 사망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절대적 힘'입니다. 그 힘을 자연의 이치로 보면, '호흡이 끊어진 죽음이라는 결핍', 그것은 결국 '자연의 변화 흐름'에 따라 채워지기만 하면 회복되는 것이므로, 그 회복이 곧, 영생입니다.


그런데, 그 '자연의 변화'를,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은 '맹신'으로, 또 어떤 것은 '미신'으로 인식합니다.

그에 관해 살펴보면, '태어나 살고, 죽는 것'에는 '순환이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영원한 변화의 순리', 그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그 순환'입니다. 분명, '태어나는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탄생과 죽음의 순환'이 '변화의 순리 속에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순환이 마치, '변화가 없는 고정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맹신'하는 것입니다. 곧 '결핍에 대한 맹신'입니다.


결과적으로, '영원한 생명'은 믿지 못할 '미신'이 되었고, '영원한 죽음'은 믿어 의심할 수 없는 '맹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지금 우리의 '절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사람이 죽어서 모든 기억을 삭제당한 채 업보에 따라 윤회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다는 것'이 '자연적 본질이 상실되는 것'임에도, 그래서 '영원한 변화의 이치'에도 거스르는 그 주장을 여러 종교에서 맹신합니다. 업보, 즉 '이미 저질러 버린 악행은 다른 어떤 선행으로도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음에도, 그 주장은 많은 사람을 속여왔고 또 속이고 있습니다.

즉, 거짓에 대한 맹신, 그것이 '미신'의 본 뜻입니다. 그와 같이, '미신과 맹신' 사이에서 '믿음을 상실한 채 갈등'하며, 그런 종교적 주장들에 휘둘리고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맹신, 미신' 그리고 '믿음'은 분별될 수 있고, '맹신이나 미신'은 '믿음'과는 다릅니다. 그런 분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제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지키는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 곧, '그를 믿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고 따르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에게 있는 그 부활과 영생을 동일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는 '새 언약'입니다. 즉, '육체를 죽이는 사망'이 그때가 이르면 끊어져 없어질 것'에 대한 지식, 증거, 계시, 믿음, 언약이 분명한 사실임을 '믿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을 살게 하는 '호흡에서 항상 증명'되고 있습니다. 즉 '호흡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삶과 죽음이 나뉘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런 '자연의 변화 이치'대로라면, '영원한 생명'은 '미신이 아닌 믿음이라는 경험'을 한 자들입니다.


또한, '영생'이 더욱 믿지 못할 '미신이 되어 버린 이유'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 즉, '자연 현상을 거스르는 그 믿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연 현상에서 '부활이 믿지 못할 것'이라면, 남편과 아내가 만나서 태어난 '새 생명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대 과학이 '생명 복제' 즉, '이미 살아있는 육체'는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 하면서도, '그 육체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은 만들지 못합니다. '생명과 탄생의 신비'는 과학의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는 풀 수 없는 '그 신비가 부모의 품에 있는 아기'이며, '그 아기에게 있는 신비'와 동일한 것이 '부활이고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의 탄생이 자연 현상이라면, '부활과 영생 또한 자연의 순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아기의 탄생'이 미신이라면 '부활과 영생' 역시 미신일 테지만, '미신이 아닌 실제'라면, '부활과 영생'은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고 '믿는 자들의 믿음,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은, 자연 만물이 '형체를 이루었다가 사라지는 순환'이 '탄생과 죽음의 순환'과 동일하다는 오해입니다. 그 오해 때문에, '윤회설' 역시 오랜 신앙으로 이어져왔는데, 그러나 '물질의 순환'과 '영원한 생명'은 그 본질이 다릅니다. 그에 관한 장황한 언급은 불필요하므로 간략만 해 보면, '영원한 생명'은 '순환하는 물질'과는 다른 '물질의 본질'이며, '영생하는 육체'는 '물질의 순환 질서'를 초월한 '생명의 실체'입니다.


부모가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을 보면서 감동받는 이유가 자신들이 태어나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신비, '그 믿기 힘든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스르고, 자연적으로는 죽음에게 자신의 결핍을 깨닫게 하는,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 탄생의 신비와 같은 '죽은 육체의 부활'은 '생명과 죽음을 분리'시키고,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 규정해 버리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 일을 최초로 성취한 이가 있으며, 그의 이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부활과 영생의 실체'입니다.

만약?, 아니 부디 필연이기를, 나처럼 가난한 사람이 부활하면 더 이상 가난이란 결핍이 있을 수 없을 테고, 육체의 장애도 없을 것이며, 떠나버렸던 내 친구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익숙했던 모든 결핍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완전한 회복과 영생'입니다. 단지 '살아가는 동안에 있는 어떤 결핍'은 나를 '영생'으로 이끄는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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