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돌아보기

by Tony C

오랜 옛날, 어느 나라, 어느 의로운 왕에게 여러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아내들의 어떤 이는 부유한 자도 있었고, 아름다운 이도 있었고, 지혜로운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이 누리는 복된 삶 때문에 안일함에 빠져 의를 버리고 악이 틈탈 기회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자기 군대를 보내 외국 정벌 전쟁을 지속하고 있던 어느 날, 자기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또한 승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왕궁 근처 어느 집에서 그의 한 신하의 아내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는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왕은 그녀를 왕궁에 불러들여 범했고, 그녀는 임신했습니다.

곧이어, 그녀의 남편이며 전쟁터에 있는 자신의 신하를 도성으로 다시 불렀고, 흠잡을 것이 없는지 찾았습니다. 그를 모함해 죽이고 아내를 빼앗기 위함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비록 왕의 민족이 아닌 이방 족속이긴 했지만, 여러 중신들 중에 있는 신실한 충신이었고 흠잡을 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전우들이 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면서 자신의 집에 돌아가 쉬지도 않았고, 아내를 따로 찾지도 않았습니다. 귀가한 군병이 그간 전쟁에 지친 육신을 잠시 쉬도록 하는 것은 본성이고, 혈기왕성한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것도 본능적인 일인데, 그러나 그에게 있는 ‘의로운 왕을 향한 충심’과 ‘전우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그의 본성과 욕망마저 압도하고 있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의로운 군주로 칭송 받던 왕은 그런 충신을 결국 함정에 빠트려 죽입니다. 어쩌면 이방인인 그를 억울하게 죽인다 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왕은, 그가 바라는 대로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냈고, 그의 손에는 자신의 상관에게 보내는 왕의 편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전쟁터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는 왕의 편지를 몰래 읽지 않았고, 상관에게 자신의 죽음이 담긴 편지를 제 손으로 전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 편지를 전하는 자를 전쟁터의 격전지로 내보내고, 함께 간 다른 병사들은 다시 복귀시켜, 그가 적병에게 홀로 전사하게 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었고, 그의 아내는 왕의 아내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후, 태중의 아기는 태어났고 평온하게 자라고 있던 어느 날, 왕에게 신의 대언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를 보낸 신은, 친히 양육한 왕의 의로움을 아껴서 ‘드넓은 국토’와 ‘정치적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주었고, 왕의 일신에는 ‘현명한 지략’과 ‘수많은 충신들’과 ‘막대한 재산’과 ‘많은 아내들’을 허락한 ‘의와 평강의 절대 신’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불의와 악에 대해 냉철한 심판을 여지없이 행하는 권능의 심판주 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의를 저버린 왕을 대적하는 대언자를 보낸 것이고, 그의 입을 통해 왕에게 임할 ‘심판’을 전했는데, 이는 동시에 ‘회심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왕은 그가 의지하는 신의 대언자를 만나,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정죄를 받았고, 곧 있을 심판의 경고도 들었습니다. 왕의 간음과 살인에 대한 심판은, ‘그의 집안과 후손에게 불화가 있을 것이고, 서로를 죽이는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며, 왕의 아내들은 타인에게 넘겨져 백성들 앞에서 온갖 악행을 당하게 될 것’ 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의 악함으로 비추어 보면, 분명 절대 신으로부터 받은 정죄라 하더라도, 자신의 죄와 허물이 낫낫이 밝혀지고 온 백성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공포입니다. 그래서 거의 반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거나, 죄를 감추기 위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그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히나, 백성들 위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대언자마저 죽이는 것이 일반 백성이 흔히 듣는 독재자의 전횡입니다.

그러나, 그 왕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신으로부터 양육 받으면서 성장했고, 온 일생동안 동행해온 삶이 있어서, 그 분을 향한 왕의 진심은 아무 것 과도 견줄 수 없는 고결한 사랑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있던 의는 저버렸을 지라도 그 사랑만큼은 본인의 목숨보다 소중했기 때문에, 왕은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또한, 그 신도 역시 그와의 오랜 추억과 왕의 후손을 통해 세울 범 역사적인 뜻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성취하고 있던 신은 결국 왕의 회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왕과 그의 후손에게 임할 모든 심판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준엄한 경고는 그들의 모든 삶 위에서 끊임없이 이글거리게 되었습니다. 즉, 왕과 그의 집안과 후손들 중 누구든지 의를 버리고 불의를 행하면, 그 이글거리는 심판의 경고 역시 가감 없이 실행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죄에 대한 심판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심판 주에게 있는 불타는 공의는 대속제물의 희생에 의해서라도 다시 세워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사랑하는 자를 사망의 심판으로부터 살려내기 위한 절대 신의 구원이 ‘대속 제물의 희생’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왕의 죄사함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된 자는 왕이 간음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 중에 있을 또 다른 아들은 오히려 모든 사람의 모든 악과 죄 마저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죽임 당해야 한다는 절대신의 예정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 된 자의 육체에 임할 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 절대 신 만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신의 예정이 궁극적인 사랑과 구원의 뜻이고 계획이었습니다.


분명 왕의 죄악은 본인과 그 자손이 모두 죽어야 마땅할 것이었지만, 그 왕가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왕의 아들들 중 단 한 아들만의 희생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것이 왕을 비롯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모든 자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예표가 되었고, 당시로서는 적어도 그 범죄한 왕만큼은 그 신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곧 타인의 죄를 대속하는 자와 그로 인해 구원을 얻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그 신의 뜻을 안 것입니다.

분명히 왕은 그의 아들이 병들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고, 결국 죽을 것이란 것도 그 경고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금식과 기도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할 시간을 가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병석에 있는 내내 금식하며 기도했고, 회복을 간구했습니다. 그 시간동안, 왕은 곧 죽어갈 아들로 인해 애곡했고, 또한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뉘우침을 거듭했습니다.

그의 비통한 심정이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왕의 신하들은 감히 위로할 바를 찾지 못했습니다. 왕의 아들은 7일동안 앓다가 죽었고, 그가 이미 죽었음에도 왕이 알면 왕도 같이 죽을까 두려워 신하들은 그 소식을 왕께 전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절부절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신하들의 태도를 본 왕은 아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직감했고, 그들에게 물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일어나 몸을 씻은 후 의복을 갖춰 입고, 그의 신에게 나아가 경배했으며, 다시 식사를 했습니다. 신하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왕의 태도에 다들 의아해했는데, 그 마음을 알고자 물어보니, 왕의 대답은, ‘아들의 회복을 간구하면 혹시 들어주실까 했는데,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뜻은 없는 것이 분명하니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잔혹한 심판 아래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신의 절대적 사랑 아래 자신이 있음’을 왕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절박한 회개’와 ‘애통한 마음’의 간구를 받아 예비된 심판마저 유보하신 그 분이 어쩌면, 또 다시 아들까지도 회복시켜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어버린 아들을 본 왕은 곧, 절대자의 불타는 공의는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 공의는 ‘대속 제물의 의로운 피 흘림’을 기쁘게 받는다는 신적 가르침도 얻었습니다. 그 최종 결과는, 그 신의 사랑 아래 있는 자의 '죄사함'과 '구원'과 '회복'이었고, 또한 떨어져 나간 악과 죄는 구원 없는 심판의 형벌 아래로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 역사를 읽으면서 내 인생에 쌓인 악한 습관과 범한 죄들을 돌아봤습니다. 이전에는 그것들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터 인가, ‘누가 무슨 죄로 어떤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들을 접하면서, ‘나도 같은 짓을 한적이 있는데, 그것이 벌받아 마땅한 죄였던가?’ 하는 질문 아닌 질문들이 내 죽어버린 양심을 두드렸고, 그 때마다 가볍게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근근히 지내면서 어느 날인가, 내가 저지른 죄가 분명히 죽어 마땅한 범죄임을 자각했습니다. 때문에 그 왕이 두려워 떨었을 공포가 내게도 엄습했을 때는 그 심판과 형벌로부터 피할 곳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내 심각했던 우울증은 육체의 죽음을 갈구하고 있었으므로 죽는 것에 대한 공포 따위는 없었습니다. 내가 경험한 공포는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보다 나아 보이는 현실의 고통, 그 마저도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느낄 만큼, 절대적이고 잔혹하며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직접 대면했을 때 찾아온 공포였습니다.


그때의 공포가 최근 다시 나를 찾아올 때가 간혹 있는데, 다행히 예전처럼 피할 길을 찾아 방황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공포가 되려 나를 죽음에서 건져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것이 여전한 공포인 것은 오래된 내 악한 습관들이 한 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론 나를 잘 아는 이가 내 과거와 현재의 허물과 잘못을 지적할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도망치려 하지 않고, 내 악한 중심을 다시 살피면서 악의 근본을 파헤칩니다. 때론 매몰되어 허우적거릴 때도 있지만, 어느 때가 되면 간신히 라도 그런 악에서 벗어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면하고 있는 그 공포도 언젠가 돌아보면 죽어가는 나를 되살린 심판의 경고로 추억하게 될 것이란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상처 입힌 이들이 여전히 고통속에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런 때는 정말 불길 앞에 있는 끈적한 석유통에 벌거벗겨져 빠트려진 것 같습니다. 그런 자책하는 심정이 나를 혹독하게 몰아가는 명분은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겠느냐? 라는 정죄인데, 그 질문에는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그것은 변명이나 핑계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살기위해 철면피가 되곤 합니다. 자살한다고 해서 그것이 책임을 지는 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살려고 뻔뻔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내 육체가 흙이 되었더라도, 다시 살아날 그 하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온갖 미움과 책망과 심지어 모함까지 받게 되더라도, 내 육체의 힘이 다하는 그날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생각들로 인해 정죄라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래전 그 왕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의지하던 신의 경고를 통해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절대자의 정죄를 나도 경험했습니다. 범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범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나를 탓하기보다는 남과 세상을 정죄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리고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면서는 세상이 이와 같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 이유가 내 속에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면서 쓰레기통에 처박혀 지내기도 했고, 뻔뻔하게 철면피를 둘러쓰기도 했으며, 내 허물과 죄를 되갚거나 책임지려 스스로를 혹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저질러진 것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다 포기하고 자기 정죄에 휩싸여 자살을 기도한적도 몇 번 있습니다. 그 마저도 내게 속삭이는 것은 ‘그런다고 깨끗해질 수 있겠냐?’라는 질문 같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서운 정죄는 나를 잘 아는 이로부터 모든 것이 낫낫이 까발려지는 정죄였습니다. 그 정죄에는 다소 억울한 오해가 점철되어 있기도 했지만, 그가 나를 몰라서 트집잡는 경우이기도 했지만, 때론 터무니없는 모함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정죄 받는 내 허물이 악이란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정리된 것은, 절대자로부터의 정죄는 ‘죄와 악’을 분별하게 했고, 나로부터의 정죄는 ‘자살’로 이끌었으며, 남으로부터의 정죄는 ‘범죄 사실에 대한 인정’이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약했던 것은 남이 내게 퍼붓는 정죄였습니다. 그 앞에서 나는 다만 사실 인정만 하고 던지는 돌을 맞은 후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정말 돌이킬 수 없었을 뻔한 정죄는, 나 스스로가 몰아붙이는 정죄였습니다. 아마 그 때 내가 결국 죽었다면 그 공포스러운 사망의 정죄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힘을 느낀 정죄가 곧, 그 절대자로부터 받은 심판의 경고였습니다. 그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공포가 다른 어떤 정죄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보니, 그 정죄가 내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지 말고 살아라’


최근 다시 마주하고 있는 그 공포와는 가끔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나는 수다스럽게 질문과 떼쓰는 말들만 쏟아내는데, 그 정죄는 구체적인 대답도 없고 번거롭다는 기색도 없이 잠잠히 듣기만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말하는 나로서는 답답하기만 할 뿐인데, 가끔 ‘그 음성을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이미 오래전 수차례 대답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내가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똑 같은 말만 지껄여대는 내가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 지 생각하면서 하게 되는 말은, ‘참고 또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그 정죄는 내가 잊어버린 죄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죄로 여기지 않는 죄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자각하거나 회개하는 죄는 내 모든 죄의 1만분의 1도 안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내 죄는 절대자 앞에서는 사망에게 던져질 죄이지만, 세상에서는 죄라고 하지 않고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듣게 된 것은 '모든 것 다 아시는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날이 이를 것이란 언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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