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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Oct 21. 2023

그리스도의 상급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3

지상에서의 상급 & 하늘 상급


모든 것 아시는 주님

요한계시록 2장 19절 [현대인]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처음보다 지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의로운]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 하셨고,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는 자를 시험해서 그들의 거짓을 밝혀 낸 일도 안다 하셨으며, 

잘 참아서 주의 이름을 위해 끝까지 견디고 지치지 않은 것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는, 그들의 고난과 가난을 알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로부터 모욕을 당한 일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에게는, 그들이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에 사는 어려운 형편을 안다고 하셨고, 

신실한 증인 안디바가 죽임 당할 때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만이 아닌 한 개인의 비밀스러운 악행과 선행들까지 모두 아시며, 그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실 권세’와 ‘의에 대한 상급을 주실 부귀와’, ‘악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행하실 권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망설임 없이 죄를 범하고는 주께서 보지 않았을 거라고, 알지 못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행태 때문에 정죄와 징벌을 행하심을 통해서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는 분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정죄와 징벌'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회개의 기회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주께서 아신다.’는 말의 의미가 ‘선과 의를 행하는 성도에게는 큰 위로이며 격려가 됩니다.’

그 위로와 격려에는 '그리스도의 상급'도 있습니다. 사는 동안은, ‘현실의 교회와 성도에게 주시는 상급’이 있으며, 첫째 부활 후에는 ‘하늘의 영광이 충만한 상급'들을 주실 것입니다.


 

삶에서의 상급

열린 문

'하늘에 열린 문' 2022

신앙의 승리자로 사는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주시는데, 그것이 현실에서 성도와 교회가 받게 되는 상급입니다. 그런데 그 상급은, 성도의 기도 중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는 물질적 축복도 아니고, 사회적 성공으로 이끌 능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는 통로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언급하신 상급은,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8절] 


그런데, 먼저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단어나 어휘를 아는 지식보다, '통찰력 있는 역사관'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그 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지 않았냐 물으면, ‘물어보지도 않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상급을 받고 싶지 않냐 물으면, ‘이미 받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때문입니다. 

그 열린 문이 무엇인지는, ‘주께 받은 자’는 곧 알게 되므로 그런 질문이 필요가 없고, ‘받지 않아서 모르는 자’에게 그것은 아직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린 문은 무엇이다.’라고 확정해서 내 입이 대답한다면 주님께서 되물으실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닌가요? 제가 틀렸군요!” 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큰 공포도 없을 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진리’는 ‘열린 문'같은 어떤 단어나 어휘의 의미’에 있지 않고, ‘역사적 흐름이 있는 문맥과 맥락 속의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역사를 함께 보는 통찰력 있는 역사관'에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관을 가진 이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계시를 볼 때, 하나님의 뜻과 이루실 일들에 대한 이해와 동참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경 65권의 모든 역사와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책이 요한계시록'이니 만큼, ‘하나님의 역사관과 함께 그분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 전제를 두고, 그리스도 계시의 이해로 이끄는 '열린 문이 무엇인지? 에 대해 아는 것은 기초 상식이므로 주께서 내게 알게 하신 만큼의 언급을 해 봅니다.

‘열린 문’은,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필요한 모든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 성령님의 양육’입니다.

그 상징은 요한이 본 ‘열린 하늘 문’인데, 그 문을 넘어 하늘 예배 성소에 오른 사도 요한에게 '이전 일과 지금 있는 일과 이후로 있을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눈으로 보게 하시고, 또 깨달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열린 문의 의미는 다시, ‘성부 하나님 여호와’, ‘성자 하나님 예수’, ‘교회의 주인 성령 하나님’을 바로 알면서 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새 언약에 대한 증거’에 대한 지식과 확신이 됩니다. 



대적자로부터 받는 존경과 경배

신앙의 승리자로 사는 자가 받을 현실 상급의 또 하나는, '일상에서 본인을 괴롭히던 원수이자, 그리스도께 대항하는 대적자로부터 존경 또는 경배'를 받게 되는 일입니다. 내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리송하지만, 만약 내가 그런 경험을 한다면, 정말 큰 상급임을 간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9절'에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유대인이라 주장하며, 거짓말하는 사탄의 집단에 속한 자들이 [네게]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겠다."


그 말씀과 관련된 여러 언급은 구약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어린양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며, 구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잠언 16장 7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그리고, 잠언 말씀의 성취가 신약의 골로새서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22절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평화의 길을 열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해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전에, 여러분의 악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나를 비롯한 모든 대적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로 물든 세계 모든 만물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의'로 서게 하셔서 화평케 하신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인 역시 비록 대적자라 하더라도 그와 화평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승리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사람 일상에서 대하는 모든 원수들 과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지식

또 한 상급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3장 9절]

즉, 예수님과 나, 곧 신앙의 승리자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사망을 이기신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부활하셨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말라기 1장 2절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너희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고 되묻고 있다. 그러므로 ~"


말라기의 기록대로, 필자가 주님을 믿지 않을 때 아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격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셔서 믿게 되기 전까지, 내가 확신했던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나와 원수다.’ 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크게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당신을 미워하는 자라 할지라도, 설사 대적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생명을 지키시고 일상에서의 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고 계십니다. 


필자가 믿음을 가진 후에도 주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는 많이 있었습니다. 

과장을 아주 조금만 더해서 말하자면, 본인이 자랄 때와 주님을 믿게 될 때까지 거지로 살았습니다. 

한 끼니 먹는 것이 어찌 그리 힘들었던지, 말로 하자면 부끄럽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인한 후에도 한동안은 그 거지 생활이 낳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먹고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게 되었지만, 가난한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데도,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그렇게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도, 

내가 받는 하나님의 물질 축복은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와 대화하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을 증오하는 자라는 것이 분명한데, 그의 재산은 엄청나서 주눅 드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가 있었고,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큰 복을 주셨다는 간증'이었습니다. 

형제 중에는 돈 좀 있는 이가 있는데, 간혹 독한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한테 돈은 안 주니?' 

다행인지 모르지만, 내가 잘하는 것 하나가 기억력 조절입니다. 상처가 될 만한 기억은 쉽게 지워버립니다.

물론, 지금처럼 필요할 때는 꺼내 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감출 수 없어서 주님께 속삭였습니다. 

'저의 죄가 너무 큰가 봐요. 저의 악한 습관들이 주께서 주시는 복을 다 걷어 차고 있나 봐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주께서도 아시겠지만, 저에게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혹시 내 입이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주님께서 '정말 사랑하냐?'라고 되물으실까 봐, 그래서 사랑이란 말은 입에 담기도 두려운데 그런데,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혹 지금이라도 저를 데려가 주시면 제 영혼이 기뻐하겠나이다. 아멘'


내 기도는 그러했고, 또 내 마음에는 병들고 악한 불만이 잘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구를 한동안 지속적으로 보게 하시면서 경건치 못한 내 마음을 진정시키셨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신 겁니다. 

그랬던 일상을 통해서 내가 얻은 한 가지 확신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평생 거지로 살며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한다 하더라도 이제 저는 괜찮습니다. 혹시나 부자가 되게 하셔도 그 풍요는 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께서 제게 주신 분명한 증거 곧, '주님께서 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그 확증'이 큰 상급으로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에서의 구원

또 하나의 상급은, 연약한 우리가 ‘인내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지켰다는 그 작은 순종 때문에 ‘온 세상에 닥칠 환란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3장 10절]고 하신 것입니다. 

죄인 된 사람에게는 어려울지언정 부요하신 주님께는 보잘것없는 그 행위에 비해 주님의 상급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은 많습니다. 주께서는 훨씬 더 많다고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중 하나는, 지난 3년 반 동안 있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에서도 안전했다는 것입니다. 백신에 대한 신뢰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백신 맞으라고 난리였어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감기도 안 걸렸었는데, 주님께서 나를 지키신다는 감동이 들 때마다 [지금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다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그와 같이 위험에서 지키심을 받고 보호를 받은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한 예를 찾으면, AD 66년부터 73년 기간 동안 있었던 유대 반란, 그중에서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그 잔혹한 멸절의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믿는 자와 교회를 지키셨습니다.

그 후로 300년 동안 지속적인 박해와 차별이 있어서 순교자가 헤아릴 수 없이 나왔지만,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더욱 강건하게 했으므로, 그들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영광이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아래로는 교회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혹시, 온 세상이 환란으로 멸절되더라도 교회는 주님의 보호 아래 오히려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도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시는 증거와 상급이 풍성해지고, 성도의 믿음이 강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성숙이 더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로 가는 길이 협소하다 보니, 그 길을 가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

기록된 마지막 하나는, '주께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많지 않고, 주님을 향해 간다 하더라도 바른 방향을 찾아가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아오신답니다. 


계시록 3장 20절 

"보라.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님을 찾거나 만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살다 보니 문득문득, '신이란 작자가 없다면 이 세상은 있을 수 조차 없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많았고, 필자가 미술가라서 자연과 사람을 많이 관찰하다 보니 발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조금씩 드러내시는 주님의 사랑을 항상 외면하기 일쑤였습니다.

오히려 고단한 인생과 악이 충만한 세상을 지은 그 신이란 작자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내게,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메시지'가 보다 직접적인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메시지가 그리스도께서 두드리시는 '노크 소리'였습니다. 

번번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또 언젠가부터는 '내가 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만든 이가 주님이심을 증거 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현실의 자연현상과 물리법칙을 초월한 이상한 일들이 빈번해졌습니다.

그 소리는 노크가 아니라 내가 닫아둔 문을 주먹과 발로 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대답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귀찮기만 했습니다.


결국,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쇠망치 소리'를 듣고서야 잠긴 문의 손잡이를 돌렸습니다.

살짝 열었을 뿐이었는데, 주님께서는 문을 박차고 들어오셔서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후로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셨고, 급하지 않게 조금씩 내 육신과 마음의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지금도 고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보다 완력도 쎄시지만, 맵집도 훨씬 강하셔서 내가 주는 상처 따위는 가볍게 튕겨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언약이 상급이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짧디 짧은 인생이 현실의 삶에서 사망을 이기고 영원의 주님과 하나 되어 산다’는 그것입니다. 

아직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죄인이, 선하시고 순결하신 만왕의 왕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십니다.


그와 같은 경험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의 그 놀람과 충격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입니다. 내 아들도 그런 충격을 내게 선물했고, 속히 죽기만을 바라던 내 우울은 삶의 의지가 되었습니다.

딸이 태어나 방긋 웃으며  처음으로 한 말이 '압빠'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멍 해진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주님과 일상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급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될 것입니다.

너무 큰 그 선물에 어두웠던 온 세상이 밝아졌었습니다. 일생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그 선물이 ‘우리를 닮아서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주님께 그런 소중한 선물이 되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무한 영광의 선물’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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