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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연숙 Dec 07. 2016

감사로 맞이하는 아침 햇살

노처녀가 시집 안 간다고 하는 것이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더니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이야. 아무리 봐도 불공평한 세상,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을 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이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 싫어서 결혼을 기피했고 만에 하나 결혼을 한다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그런데 웬걸. 마흔이 넘어서 엄청(?) 차이 나는 연하의 프러포즈를 받고 가족들의 결사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하더니 석 달 만에 아기를 가졌다. 아기는 가족들의 마음에 이해와 용서와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신세계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강원도 전방의 군 교회에서 하던 성경공부 교재 제목을 따서 태명을 예인이로 정하고 동행을 시작했다. 두려움, 불안, 설렘, 환희 등 여러 가지 감정의 굴곡을 경험하며 임신 기간을 보냈다.     

  “옛날 같으면 벌써 죽었다.” 인큐베이터에서 두 달을 보내고 집으로 데리고 온 예인이를 보면서 친정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맞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임신 8개월이 되었을 때 아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기 배에 물이 차있다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 병원의 의사는 그때 어떤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하면서 기다려보자고 했다. 수술 날짜를 잡고 나서 아기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건강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뒤섞인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후 수술대 위에 누웠다.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침대 곁에 서 있던 남편의 얼굴은 어두웠다. 

“예인이는 어때?” 

“얼굴이 비대칭이고 한쪽이 찌그러져 있어.” 

눈물이 앞을 가리고 아기의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향했다. 예인이는 산소호흡기와 여러 개의 줄을 달고 있었고, 황달 치료 때문에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기계에 생명을 의지한 아기의 모습을 보니 애처롭고 미안한 마음에 그저 눈물만 흘렸다.     


  ‘낳아서 미안하다. 낳아서 미안하다.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생명은 생명 자체로 사랑스러웠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꼼틀거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코와 입이 아빠를 많이 닮았다. 고불거리는 머리카락과 긴 손톱은 아빠를 쏙 빼닮아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직접 보니 남편의 말을 듣고 상상했을 때보다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의사의 말을 들으니 예인이의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다. 태어날 때 태변을 먹어 양쪽 뇌가 손상되었고 여러 가지 검사 결과 ‘코넬리아 드 랑게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이 있다고 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발달 장애 증후군의 하나로 지적 장애, 성장 장애, 사지 기형 및 특징적인 안면 모양이 주 증상이라고 한다. 진단서에는 열 개가 넘는 병명이 적혀있었다. 뇌, 심장, 신장, 폐, 간, 췌장, 눈, 귀, 팔, 다리 등 멀쩡한 곳이 없었다. ‘만신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처음에는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인 줄 알았다. 아침마다 창가에 비치는 햇살마저 싫었다는 한 환우 엄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느껴졌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수술과 각종 검사로 2년여를 병원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예인이의 환한 미소와 이모저모로 도움을 주신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다. 나의 삶에 관심을 두고 손잡아주고 함께 걸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롯이 혼자이고 싶었는데 큰 사랑의 손길들이 나를 감쌌다. 덕분에 예인이를 돌보는 일이 한결 가벼웠다. 젊은 시절 인생의 무상함을 곱씹고 있었던 나에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큰 위로가 되었는데 예인이를 돌볼 때도 힘이 돼 주었다. 


애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한 생명의 아픔 덜어줄 수 있거나,

괴로움 하나 달래 줄 수 있다면,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도와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뭔가 큰일을 해야만 삶이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기에도 바쁘고 무기력한 내 모습에 한탄하고 있을 때 접하게 되었던 시다. 아주 작은 선행도 의미가 있다는 시인의 노래가 우울했던 이십 대 초반에 살아갈 이유를 더해 주었다. 예인이를 낳은 후에 나는 헐떡이는 작은 새처럼 주변의 도움을 받았고, 내 작은 새, 예인이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수술실 들어가기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만났던 한 아기 엄마는 시부모님이 장애를 가진 아기의 손 한 번 잡아주지 않았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그녀의 아픈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장애가 있건 없건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 소중하다. 환우회의 카페에서 영상을 하나 본 적이 있다. 영상에 나오는 환우의 언니는 여섯 살 정도 됐는데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아프게 태어날 수도 있고 건강하게 태어날 수도 있잖아요. 동생은 아프게 태어난 것뿐이에요.” 아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아이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겠지만 그렇게 동생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었던 아이가 대견했다. 그래.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살다가 내가 장애를 가질 수도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불평하기보다는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사실은 사실일 뿐. 그것에 나의 행복과 불행이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은혜였다. 예인이를 맞이하고 난 후, 나는 웬만한 일에 좀처럼 불평하지 않는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퇴원기념

  세월이 흘러 얼마 전 예인이는 아홉 살 생일을 맞이했다. 지금도 여전히 여러 가지 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걸어 다니는 모습만 보아도 흐뭇하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운다. 콧줄로 우유를 주느라 진땀을 빼던 시간, 새벽에 경기를 종종 해서 정신없이 울고불고했던 시간,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부러운 눈길을 뗄 수 없었던 시간, 아이 나이를 묻는 말에 답하기를 주저했던 시간, 병원에서 만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눴던 환자와 가족과 의료진들…. 예인이와 함께했던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성숙시켰는지.

  40대 중반이 훌쩍 넘어 둘째를 낳았다. 건강하기만을 기도했다. 장애아를 셋 낳은 사시키 시호미는 "장애도 못 말리는 명랑엄마의 행복선언"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인생이 장밋빛이라고 말했다. 명랑을 타고난 모양이다. 나라면 어떨까? 명랑까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둘째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시집을 안 가겠다고, 간다고 해도 애는 안 낳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남편 포함 아들이 셋이다. 혼자였다면 고상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인생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아들들 뒤치다꺼리에 여념이 없지만 생명이 함께함이 이토록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쳐준 이들이기에 섬김에 힘을 내어 본다. 매일 아침 창가에 비치는 아침 햇살을 감사로 맞이하면서.

예인이 고향 화천 풍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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