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향을 머금은 붓끝에서, 삶이라는 화선지 위에 남기는 중년의 문장'
어느덧 흰 머리카락 한 올을 보고 놀라던 때는 훌쩍 지나고, 이제 거울을 보면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반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 흰 화선지라면, 이 머리카락은 그 위에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붓끝과도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흰머리는 단순한 세월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긴 시간의 농도를 품은 붓의 흰 털이며, 중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검은 묵을 머금고 천천히, 그러나 깊이 있게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삶의 문장의 도구입니다.
젊은 날의 삶은 늘 바쁘고 앞만 보며 달렸습니다.
돌아볼 틈도 없이 공부하고, 경쟁에 이기려 애쓰며, 사회 속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숨 가쁘게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에서는 가장 많은 책임이 주어진 나이에 이르자 삶은 더욱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삼십 대와 사십 대는 하루하루는 길었지만, 돌아보면 손에 잡히지 않는 속도로 지나갔습니다. 그 시간을 기억하되, 어느덧 우리는 중년에 도달했습니다.
중년은 인생의 중심에 서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더 이상은 앞서 나아가는 속도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새기는 깊이가 중요해지는 시기입니다.
그 깊이는 흰머리에서 비롯됩니다. 검고 빳빳했던 젊은 날의 붓은 이제 흰 털이 섞인 부드러운 붓이 되었습니다.
그 붓으로는 조급한 글은 쓸 수 없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써 내려가야 비로소 뜻이 새겨집니다.
삶이라는 화선지 위에 흰머리 붓으로 써 내려가는 문장들은 젊은 날엔 미처 알지 못했던 인내와 관용, 아픔과 회복, 희망과 내려놓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이제야 비로소 글이 됩니다. 젊을 때는 쓸 수 없었던 문장, 깨닫지 못했던 문장의 맛이 이제는 흰머리로 인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집니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고, 어떤 날은 흐트러지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심한 하루조차도 삶의 책에 소중한 한 줄로 기록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주름진 얼굴, 희끗해진 머리칼, 쉬어가는 숨결.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만들어낸 기록입니다. 그리하여 중년의 나는 흰머리로 묵을 찍고, 삶이라는 긴 화선지에 조금씩, 그러나 정성스럽게 인생의 시를 써 내려갑니다.
흰머리가 많아질수록 삶의 문장은 더욱 깊어지고, 그 깊이는 시간과 함께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오늘도 거울 앞에 선 나는
검은 묵을 머금은 흰머리 붓으로
나의 인생 책 한 귀퉁이에 조용히 문장을 남깁니다.
그것은 후회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냈다는 고백이며 성숙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한 페이지 끝자락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문장이 조용히 새겨지고 있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들과 잘 이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