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누구의 탓’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환경의 탓을 하고, 관계가 어그러지면 상대의 탓을 합니다. 그러나 홍대용의 『담헌서』를 읽으며, 저는 이 ‘탓’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망하고 또 얼마나 우리를 가두는 덫이 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홍대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자신부터 선해야 마땅히 좋은 사람은 좋아하게 되고, 악한 자는 싫어하게 되어 선한 자는 자연히 가깝게 되고 악한 자는 절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는가? 말하자면 돌이켜 자신에게 구해야 한다.”
홍대용은 인간관계의 근본을,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위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연과 일의 결과는 외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은 선한 기운을 불러오고, 악한 마음은 악한 기운을 끌어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탓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며, 삶의 중심을 잃는 일입니다.
탓은 늘 바깥을 향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눈은 언제나 안쪽을 향합니다.
나의 시선이 흐려지면 세상은 온통 어둡고, 나의 마음이 비뚤어지면 모든 것은 불공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로 세우면, 세상은 그 모양 그대로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바람이 거세도 나무는 자기 뿌리로 선하고, 파도가 거칠어도 바다는 본래의 깊이를 잃지 않습니다. 사람 또한 그 마음이 바르게 서면, 세상 어떤 흔들림에도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결국 ‘탓’이란, 미성숙한 자아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뱉는 방패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방패는 곧 우리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탓하는 순간, 나는 그에게 내 마음의 주권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탓은 책임을 넘기는 말이지만, 동시에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돌이켜 ‘나에게서 구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 마음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용기에서 성장은 비롯됩니다. 그때 비로소 탓은 사라지고, 감사가 자리를 잡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달려 있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 순간을 배우고, 매 만남 속에서 자신을 수양합니다.
모든 것의 원인도, 결과도 결국은
“내게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나를 바꾸어야 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면 먼저 내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합니다.
탓을 멈추는 순간,
삶은 고요해지고,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진리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