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흰색을 마주하는 나이, 중년"

by 가치지기

나는 비교적 일찍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진짜 중년에 접어드니 수염에서도, 코털에서도 듬성듬성 흰색이 보이더니 이제는 흰색 반, 검은색 반으로 뒤섞여 가고 있습니다. 동갑내기인 아내는 한동안 흰머리가 보이지 않더니, 이제야 그 흔적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차 문에 붙어 있는 아내의 긴 흰 머리카락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습니다. “왜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몸은 흰색과 가까워질까?” 흰 머리카락, 흰 수염, 그리고 언젠가 흰옷 속에서 이 세상과 이별할 제 모습을 떠올리며, 흰색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흰색은 단순한 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색을 품은 색입니다. 빛의 스펙트럼이 하나로 모일 때 만들어지는 순수한 상태이자, 혼잡함과 잡음을 벗어난 고요의 상징입니다.


흰색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다리와도 같습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깨끗한 흰 천으로 감싸이고, 떠날 때에도 흰 수의를 입습니다. 흰색은 삶과 죽음을 잇는 순환의 상징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여정을 상징합니다. 겨울의 흰 눈처럼, 흰색은 모든 것을 덮고 순수하게 만듭니다. 겨울의 마지막 계절이 모든 계절을 마무리하며, 흰 눈으로 세상을 덮듯이, 나이가 들면서 흰색은 우리 삶의 마지막 계절에 다가가게 합니다. 그 흰 눈은 고요함과 평화를,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흰색이 무(無)와 연결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무욕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준다"라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흰색을 마주하는 이유는 욕망과 집착에서 멀어지라는 삶의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흰 머리카락은 세월의 흔적이자, 과거에 머물렀던 무수한 욕망의 무게를 덜 어내며 얻게 되는 가벼움의 상징일 것입니다.


서양 철학에서 흰색은 순수함과 신성함을 상징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는 흰색을 완벽한 본질과 같은 깨끗한 상태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흰색은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색이자, 영혼이 머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 흰색을 마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쇠약함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욕망에 발목 잡히지 않고 자신을 맑게 비워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흰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포용의 색입니다. 그렇게 삶의 온갖 희로애락을 껴안으며 결국 고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 듦은 그런 고요 속에서 자신을 비우고, 다시 채워나가는 시간입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흰 국화꽃으로 배웅받는 날이 오더라도, 저는 흰색의 길을 걸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욕망을 덜어낸 자리에 감사가 깃들고, 시끄러운 욕심의 소리는 잔잔한 마음으로 변합니다. 흰색은 단순히 나이 듦의 표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여정이며, 마침내 내면의 평화를 얻는 색입니다.


저에게 흰색은 이제 평온과 수양의 색입니다. 흰색을 마주하며 저는 삶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고, 나이 듦을 통해 스스로를 더욱 맑게 다듬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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