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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반과 괴테 사이, 여행을 포장하는 시간

유럽행 캐리어, 밥심과 꿈심으로 꽉 채우다

by 은하수반짝
기다려라 짭쪼롬 프레첼이여!


“캐리어를 몇 개 챙길까?, 큰 거 두 개? 아니면 각자 하나씩?”

“아이들이 울퉁불퉁한 돌길에서 캐리어를 끌고 잘 따라올 수 있을까?”

여행 준비의 영원한 첫 질문은 바로 캐리어 개수다. 결론은 “넷”! 어른들은 대형, 아이들은 기내용으로 각자 한 개씩. 이유는 명확하다. 아이 스스로 짐을 싸고, 정리하고, 끌고 다니는 것부터가 책임감을 배우는 성장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간에 빨래를 한 번 하기로 하고 옷과 속옷은 반만 챙겼다. 문제는 날씨였다. 6월의 유럽은 ‘덥다면서 춥고, 맑다면서 비 오는’ 종잡을 수 없는 계절이었다. 반팔과 얇은 긴팔을 반반 챙기고, 얇은 바람막이와 알프스용 두툼한 가디건도 껴넣었다. 여행의 진정한 드레스 코드는 레이어드, 추우면 껴입고, 더우면 벗자.

가족만의 단합 아이템도 고민했다. 커플티를 맞출까? 색깔만 맞출까?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커플 운동화였다. 튼튼하고 발 편한 트래킹화에 투자했다. 유럽은 걸어다니는 나라다. 하루 만 보는 기본, 이만 보 걷는 날도 허다하다. 스타일보다 중요한 건 발바닥의 생존과 허리의 안녕이다. 단 하나만 산다면 망설이지 말고 신발에 투자하라. 이건 진심이다.

신발을 사면서, 챙 넓은 모자, 400ml 물병, 바람막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 넉넉한 크로스백도 함께 장만했다. 이들을 사면서 들떴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지도 위에서만 보던 도시가 가까이 있는 느낌, 아이들도 좋은지 신나서 팔짝팔짝 뛰었다. 짐을 꾸리면서 여행 절반은 시작된 셈이었다.

제 아무리 빵순이라도 기본값은 역시 밥이다. 거기에 유럽 외식 물가는 팁까지 더해지니 살짝 무섭다. 10끼 분량의 햇반을 챙기고, 냄비 안에 전기 가열판이 쏙 들어가는 전기포트도 구입했다. 볶음김치, 멸치볶음, 쇠고기 장조림, 김, 소고기 고추장, 깻잎까지 6첩 도시락을 네 개의 캐리어에 골고루 나눠 담았다.

전략은 이랬다. 먹을수록 비는 자리에 기념품을 채우자! 하지만 현실은 너무 많이 가져왔다. 자주 먹다보니 한식이라도 질렸다. 일부는 유럽까지 가서 돌아온 ‘한식 기념품’이 되었다. 다음에는 기차역이나 길거리에서는 쉽게 파는 부어스트, 샌드위치, 프레첼, 커피로 아침을 더 간단히 해결하자고 다짐했다. 짐은 덜 싸고 먹는 건 더 맛있게!

이건 책이 아니라 내면 여행의 지도

상비약은 필수다. 두통약, 감기약, 밴드, 설사약, 후시딘은 기본이다. 난 시차 적응 실패로 두통이 왔고, 남편과 아이들은 감기 증상에 시달렸다. 다행히 준비한 약으로 무사히 회복. 여행지에서 약 한 알은 슈퍼 히어로다.


목베개는 전날 만 원짜리 네 개를 샀지만, 기내 의자 날개 덕분에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기차에서도 불편해서 캐리어에서 나올 일이 없었다. 다만 앉은 키가 작은 아이는 헤드레스트가 닿지 않아 요긴할 때가 있다. 다음엔 한 개만 챙겨야겠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아이들용 활동지와 일기장, 드로잉 세트도 빠질 수 없다. 문학적 감성을 위해 괴테와 릴케 미니북, 온라인 전자북에 여행 가이드북도 다운로드 완료. 무료한 순간을 위한 영상은 ‘벌거벗은 세계사’로 정했다. 어쩐지 유럽 배경과도 찰떡.

이렇게 짐을 싸면서 우리 마음은 이미 유럽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아이들과 “이건 독일에서 입을까?”, “프라하에선 꽃무늬 원피스지~” 수다 떨며 고른 물건 하나하나가 추억의 첫 페이지가 되었다. 짐을 싸는 건 단순한 준비가 아니다. 설렘을 꾹꾹 눌러 담는 작은 의식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행은 출국장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쇼핑센터에서 그리고 옷장 앞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인생도 딱 이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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