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함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와 여유
아침 7시 프랑크푸르트 공항. 장거리 비행은 낮과 밤을 뒤엉켜 놓았다. 몽롱한 정신 탓인지 공항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같았다. 아이들은 키 큰 백인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기차 타고 뮌헨 숙소에만 도착하면 입국 미션은 끝이 난다.
탑승까지는 2시간 30분이 남았다. 공항 위층에는 대형 미끄럼틀을 품은 맥도날드가 있었다. 통유리 창문으로 활주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유럽은 맥도날드조차 감성이 남다르다며 아이들은 미끄럼틀로, 우린 모닝 커피를 탐하러 갔다. 아, 카푸치노! 유럽 커피의 기본값은 카푸치노다. 꾸덕한 쿠키에 거품 한 모금, 긴장감이 사라지고 비로소 진짜 유럽임을 실감했다.
차창 밖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콩알만 하던 기체가 점점 다가오며 어마어마한 날개를 펼쳐 보였다. 아이들이 소리쳤다.
“엄마, 비행기 진짜 크다! 아까 저게 하늘에 떠 있었던 거야?”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기체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평화로운 순간을 깬 건, 남편에게 온 한 통의 메일이었다.
“아아! 기차가 취소됐대. 빨리 역에 가야겠어.”
출발 1시간 30분 전에 취소 알림이 오다니, 잠이 확 깼다.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사이의 거리는 390km, 부산에서 춘천까지의 거리다. 이러다 오늘 안에 숙소에 못 가는 거 아닐까, 근면성실의 대명사 독일 아니던가? 이 나라의 철도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넷은 걷는 듯 뛰었다. 전차를 타고 역으로 이동하는 20분이 마치 2시간 같았다. 숨차게 도착한 창구에서 직원은 너무나 태연하게 기차표를 교환해 주었다. 원래 타려던 것보다 한 시간 더 빠르고 금액도 비싼 표를 추가금 없이 건넸다. 끝이 아니었다. 출발 시간이 10분도 안 남아 있었다. 우린 또 걷는 듯 날았다.
“후우 살았다.”
좌석에 풀썩 앉자마자 진심으로 안도했다.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하니까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인가, 하지만 다시는 겪고 싶진 않다. 절대로. 하지만 이후 독일 여행 내내 우린 기차역에서 뛰고 또 뛰었다. 이번엔 많은 승객들과 함께였다. 환승 기차를 놓칠세라 캐리어를 끌고 전력 질주했다. 그 행렬은 마치 슬랩스틱 영화 같았고, 원치 않았지만 그 코미디의 열연 배우들이 됐다.
독일 기차는 정시율이 낮기로 유명하다. 파업과 시스템 개편이 잦아 운행 변경이 빈번하다. 워낙 땅이 넓고 노선도 많다 보니 시스템 역시 ‘완벽함’보다는 ‘유연함’을 선택한 듯했다. 기차뿐 아니라 지하철, 트램, 버스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모든 승객이 교통카드를 태깅하지 않는다. 지하철에는 게이트(개찰구)가 없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탑승한다. 사복 검표원이 무작위로 검표를 한다지만 우린 여행 내내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 교통 티켓 1회권은 일 인당 3유로, 대략 5,000원이다. 편도 금액으로는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우린 이건 우리 양심이자, 나라의 품격이라고 말하며 꼬박꼬박 티켓을 샀고, QR코드를 찍었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유럽 대중교통은 관광객이 먹여 살린대.”
웃긴데 좀 슬펐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독일 대도시의 무임승차 비율은 5%에 달했다. 20명 중 1명은 무임승차다. 하지만 어쩌랴, 타국에서 범법자가 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보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킥보드를 끌고 탄 중학생 서너 명이 구김살 없이 웃고 있었다. 성적과 학원 가방에 눌린 듯한 한국 학생의 무표정한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스스로 배우고 판단하기보다 외부의 기준에 맞추길 강요하는 한국 교육. 시험을 위한 공부, 어릴 때부터 내면화된 경쟁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점점 눈치 빠른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간다.
감시보다 신뢰, 처벌보다 자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마음. 그 속에는 확실히, 느긋함과 사람을 믿는 여유가 스며 있었다. 그게 바로 진짜 자율이고, 신뢰가 만든 문화였다. 그렇게 ‘믿고 맡기는’ 분위기 속에서 이 아이들은 의무감이 아니라 책임감, 눈치가 아니라 도덕성을 배우겠지?
솔직히, 부러웠다. 확, 아니 미치게 부러웠다.
기차는 어느덧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나 초록의 들판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뉘른베르크에 다다르자 붉은 지붕과 고딕 첨탑이 동화책처럼 펼쳐졌고, 아이가 창밖을 보며 홀린 듯 말했다.
“우와, 저기 진짜 사람이 살아? 진짜 동화 속 풍경 같아.”
기차는 평화롭고 신비한 풍경은 유럽에 막 상경한 우릴 설레게 했다. 기차 한 칸에서도 철학이 굴러다니는 독일, 기차 창밖엔 마치 시간도 천천히 걷는 듯한 풍경이 이어졌다. 빠르게 달리되, 조급하지 않은 유럽식 삶의 리듬이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