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미리 만난 공잘공즐 인문학 탐험대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 시작됐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 세계지도에 첫 도시 이름을 찍는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보름 일정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세 나라를 누빈다는 건, 말 그대로 ‘도전’이었다. 여행사들은 ‘동유럽 9박10일 정복’ 같은 광고 문구로 여행 본능을 자극했지만, 솔직히 동유럽을 열흘만에 정복한다는 것은 지도만 정복하고 끝나기 딱 좋은 여행이다. 우리는 감탄 후 셔터 누르고 끝인 속성 여행이 아닌 충분히 생각하고 배우는 여행을 원했다. 하지만 쾰른 대성당도 베를린 장벽도 디즈니성의 모태인 노이슈반스타인성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핑게로 최대한 욕심을 부렸다. 베를린, 뮌헨, 프랑크푸르트, 퓌센, 쾰른, 빈, 인스부르크, 프라하까지 여덟 도시를 종횡무진 누비기로 했다. 이렇게 ‘공잘공즐 인문학 탐험대’가 결성되었다.
여기서 '공잘공즐'은 ‘공감 잘하는 가족, 공부 즐기는 아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학교 현장에서 내가 느낀 자괴감에서 출발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초롱초롱하던 아이들의 눈빛이 중·고등학교만 오면 해가 갈수록 흐리멍덩해졌다. 입시를 위한 공부, 정답을 빨리 찾기 위한 공부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과 방법을 앗아갔다. 학기 초, 창의력과 사고력을 길러주자 수업에 모둠 토론과 찬반 토론을 수시로 했었다. 야심차게 PPT자료와 활동지를 제작하며 신바람나게 수업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슬프게도 차가운 민원이었다. “선생님이 교과서 정리보다는 자꾸 스스로 생각해서 발표를 시킵니다. 시정을 부탁드립니다.” 그 말 앞에서 맥이 탁 풀렸다. 미래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그냥 열심히가 아닌 의미있는 공부를 해야할텐데....학교에서는 쉽지 않으니 집에서라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보자. 그 모습을 SNS에 올려서 퍼뜨려보자. 이렇게 ‘공잘공즐’이 시작되었다.
공잘공즐 유럽 인문학 수업의 핵심은 ‘미리 맛보기’였다. 최고의 반찬이 시장이듯, 최고의 체험은 배고픈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나라별 역사와 문화를 담은 실사 중심의 책들과 세계 명작 등을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과 저녁마다 읽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프카의 『변신』, 『안네의 일기』까지. 밥 먹을 땐 유튜브로 여행 브이로그와 보고, 주말엔 <벌거벗은 세계사>와 <설민석 세계사 강의>를 함께 시청하며 도시와 역사,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인문고전과 현대 매체가 어우러진, 우리의 작은 유럽 순례였다.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나라별 가이드’를 맡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다솔(첫째 아이, 초6)이는 체코, 온유(둘째 아이, 초3)는 뮌헨, 나는 오스트리아를 맡았다. 우린 가이드 북과 AI 검색, 캔바의 도움을 받아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발표일이 다가오자 집 안은 마치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책을 뒤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이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사진과 동영상을 첨부하는 일에 재미를 붙인 듯 유난히 몰두하며 뿌듯해했다.
재미있는 공부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더 오래 기억되리라. 기차표와 숙소 예약을 하느라 그간 분투했던 남편도 우리들의 발표를 지켜보며 흐뭇해했다. 그의 속내는 분명 이랬을 것이다. “그래, 통장이 텅장이 됐지만 충분히 보람이 있네.”
난 도시마다 ‘엄마표 인문학 활동지’를 만들었다. 대표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를 찾아서 공부했고, 사진을 곁들여 질문과 활동 내용을 구성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카프카의 벌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본 뒤, 당신만의 드림 캐슬을 그려보세요!” 기차 안에서 써 내려갈 알록달록 활동지가 아이들 머릿속에 호기심 불꽃을 튀기고, 상상력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길 바랐다. 아날로그 방식은 느려도 기억에 더 깊이 그리고 오래 스며든다.
마지막은 ‘공잘공즐 규칙 정하기’였다. 각자의 버킷리스트도 공유했다. 분위기 좀 잡을 줄 아는 남편은 ‘도시별 대표 카페는 꼭 가기’, 미식가인 다솔이는 ‘나라별 유명한 음식은 다 먹기, 특히 모차르트 초콜릿은 꼭!’,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온유는 ‘사진 찍을 시간 넉넉히 갖기’를 외쳤다. 여행은 모두의 소망을 반쯤씩은 실현하는 예술이다. 현실과 이상을 조율하며, 우리는 여섯 가지 약속을 정했다. 위의 세 개를 포함하고 나머지는 ‘서로의 기질을 존중하기, 골고루 짝꿍하기, 말 끊지 않고 끝까지 듣기, 비난하지 않고 칭찬하기’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타는 일. 유럽의 풍경과 향기, 그리고 가족의 동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