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이루는 순간, 얼굴을 드러낸 진짜 행복
밤 10시쯤 프라하 중앙역은 묘하게 으스스했다. 유럽 역 주변이 으레 그렇듯 부랑자들이 어슬렁거렸고, 소매치기라도 나타날까봐 긴장이 됐다. 역 안 마트에서 아침거리를 사던 중, 카운터 직원과 부랑자들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다. 잠시 뒤 덩치 큰 관리자가 달려와 진정 시켰지만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숙소는 역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네 개의 캐리어는 좁은 돌길에 자꾸만 끼었고, 경사까지 있어 들다시피 끌어야 했다. 네 개의 캐리어 바퀴의 통통거리는 소리가 캄캄한 골목을 울렸다.
힘겹게 도착한 숙소는 곤두서 있던 마음을 단번에 풀어줄 만큼 안락했다. 폭신한 퀸사이즈 침대 두 개, 파스타 향이 은은히 배어있는 현대식 주방, 널찍한 욕실과 대리석 욕조까지. 순식간에 기분이 환해지고 따뜻해졌다. 다른 유럽 도시보다 저렴한 프라하 물가에 감사했고, 무엇보다 여행 중반에 이런 숙소를 마련해 둔 남편의 센스에 모두 엄지척을 보냈다. 아이들은 커다란 침대를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편안한 집이 그리웠다. 특별한 경험을 위해 유럽까지 왔지만 정작 우리를 가장 크게 웃게 만든 것은 편안한 공간이란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프라하는 도보로만 다녀도 웬만한 명소를 둘러볼 수 있기에 재정비도 할 겸,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이루며 쉬기로 했다. 내 간절한 소원은 ‘반신욕’. 매일 이만 보 가까이 걸은 탓에 발가락과 발등에 물집이 잡혔고, 종아리와 허리 근육이 단단히 뭉쳤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은은히 스며드는 쾌감이 온몸을 적셨다. 몸이 개운해지자 신기하게도 가족들 하나하나가 더 이뻐 보였다.
남편의 버킷리스트는 새벽의 카를교 산책이었다. 10년 전 혼자 프라하에 왔을 때, 동트는 다리를 내달리는 어린 다솔이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했다. 언젠가는 꼭 가족과 이곳을 걷고 싶었다는 그 소망을 실현할 차례, 남편과 채비를 하는데, 온유가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 나섰다. 카를교로 향하는 길, 새벽 공기는 밤의 들뜸이 가라앉아 한결 묵진하면서도 달큰했다. 반반한 돌길 위에 비친 햇살 조각이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드디어 카를교 입구에 도착, 이 다리를 건축한 카를 4세의 동상과 올드타운 브릿지 타워가 보였다. 그 옆, 카를교 뮤지엄에는 숫자 135797531이 새겨져 있었다. 1357년 7월 9일 오전 5시 31분, 카를교 착공을 기념하는 숫자였다. 오름차순과 내림차순으로 대칭을 이루는 이 특별한 배열 속에는, 다리가 영원히 견고하고 특별하길 바라는 체코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박물관 앞 테라스에 서니 카를교의 장엄한 자태가 한눈에 펼쳐졌다.
과거에 통행세를 걷었다던 올드타운 브릿지 타워를 지나 카를교를 걸었다. 이곳은 열여섯 개의 아치가 다리를 지탱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로서 칠백 년 동안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며 체코의 굴곡진 역사를 증명했다. 낮에는 화가와 음악가, 전 세계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새벽 카를교는 고요했다. 은빛 안개가 강 위로 피어오르고 양 옆의 조각상들은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서 있었다.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여행의 피로가 풀리며 몸과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맑은 바람 덕분에 멀리 솟은 프라하성이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우린 예수 조각상과 얀 후스 신부 동상 앞에 멈춰 체코인들의 신앙심을 들여다 보았고, 반들반들 윤이나는 그림 조각을 쓰다 듬으며 소원을 빌었다. 온유와 남편이 다리 위를 시원하게 내달렸고, 어느새 블타바강도 은빛으로 춤을 추었다. 그렇게 우린 새벽의 프라하가 건네는 위로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프라하에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감성이 흘렀다. 여기에 잠시 머물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일었다. 실제로 우린 대형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샀다. 숙소에서 집밥 같은 아침을 차렸다. 구운 소시지, 에그스크램블, 순살 치킨, 파스타, 과일 샐러드가 푸짐하게 놓인 식탁은 우리 가족만의 작은 뷔페였다.
코인 세탁소에 들러 밀린 빨래를 하고, 하벨 시장으로 향했다. 각 도시마다 기념품을 사 모으고 싶다던 온유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기념품 가게들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온유는 고심 끝에 금빛으로 빛나는 장식 접시를 골랐다. 접시 위에는 새벽빛을 머금은 카를교와 프라하성이 무지개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접시는 지금도 우리 집 식탁 옆에서 그 유럽의 기억을 찬란하게 품어내는데 그 때마다 아이의 세심한 선택에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이제 남은 것은 다솔의 소원. 그녀의 바람은 달달구리를 맘껏 먹는 것이었다. 눈여겨 보았던 수제 사탕 가게에 들렀다. 알록달록한 사탕과 캔디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다솔은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인 사탕과 젤리를 고르며 입가에 터져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마음껏 캔디를 꺼내 먹으며 그 순간만큼은 여행의 피곤함을 잊은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했다.
많이 보고 느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분명 여행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진짜 행복은 의외로 평범한 곳에 숨어 있다. 화려한 성과 박물관보다, 뜨거운 욕조 속에서 피로가 스르르 풀리던 순간, 새벽 공기에 몸과 마음이 녹아들던 순간, 소박하지만 푸짐하게 차린 가족의 식탁 그리고 기념품 접시와 사탕을 고르며 아이들이 짓던 환한 웃음. 오래 남을 행복한 기억은 이런 소소한 장면들이었다. 어쩌면 행복이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이런 작고 단순한 만족 속에 숨겨진 보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