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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하는 쏘쏘엄마 Dec 29. 2021

인사하지 않는 딸을 재촉한 아침에 (+인간중심상담)

인간 중심 상담_자기실현 경향성


연휴가 끝나고 오랜만에 등원을 했다. 아빠의 휴가가 어제까지 이어져 정말 오랜만이었다. 서둘러 어린이집으로 향하니 평소 좋아하던 여자 친구와 엄마가 있었다. 등원 시간에 딱 맞춰 와서 그런지 선생님들께서 분주하신가 보다. 평소보다 긴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

친구가 행복이를 보고 반가워서 인사를 한다.

그런데 행복이가 친구 엄마를 힐끔 보더니 인사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이제 많이 용기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인 것만 같아 아이의 사소한 행동에 마음이 쿵 했다.......... 아우 지겨워. 이제 괜찮은 줄 알았더니 다시 제자리야?


정적이 흐른다. 친구 엄마 보기에 민망하다. 재촉하고 싶다.

인사해!! 안녕하라고!! 친구가 안녕했잖아 그럼 너도 바로 대답을 해야지!!! 아우 답답해. 엄마가 있어도 이 정돈데 어린이집 가면 또 한 마디도 안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친구가 보고 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애써 웃으며 행복이를 툭 치며 얘기했다.

"행복아 인사를 하는 것은 중요해, 그래야 친구가 행복이가 친구를 반가워하고 좋아하는 걸 알거든."

그러자 잠시 후 행복이가 가만히 있다가 나에게 조용히 대답한다.

"알아, 부끄러운데 하려고 했단 말이야."


내 얼굴이 빨개졌다. 행복이가 곧 친구에게 손을 흔들자 현관문이 열렸고 선생님이 나오셨다. 친구들도 곧이어 더 와서 정신없이 우르르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왜 자꾸 똑같은 실수를 하는 거지, 왜 매번 아이를 충분히 믿어주지 못할까.
왜 항상 내 속도대로 아이를 재촉하는 걸까.
왜 너무도 자연스럽게 당연히 행복이는 인사를 못하는 아이라고 여기고,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 상담을 공부하며 외우다시피 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 알지 못한단다.
 아마도 거기에
네가 놀랄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만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너와 함께 기꺼이
이 문을 통해서 걸어 나갈 거야.

난 네가 이 문으로 나가도록 이끌지도 않을 것이고
또 너를 밀어 넣거나 따라가지도 않을 거야.
 난 완전히 네 옆에 함께 있을 것이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는 함께 발견하게 될 거야.

난 네가 이런 과정에서 무엇을 찾든지 간에
잘 대처하고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Garry L. Landreth,
놀이치료-치료 관계의 기술, 2020, p_109)







"난 네가 이런 과정에서 무엇을 찾든지 간에
잘 대처하고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믿지 못했다.

엄마인 내가 아이의 성장을 믿어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은 "넌 못할 거 같아.."라고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칼 로저스의 인간 중심 상담에서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은 욕구인 자기실현 경향성이 있는 긍정적인 존재로 인간을 바라본다. 아이 안에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에서 상담자는 어떤 기법을 많이 쓴다던가, 주도적으로 계획해서 상담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스스로 잠재된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해나갈 수 있도록 촉진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촉진적인 환경이란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존중을 하며, 아이의 어떤 마음이나 생각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과장하거나 거짓이나 가식이 없는 진솔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태도만 있어도 아이는 스스로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난 네가 이 문으로 나가도록 이끌지도 않을 것이고,
또 너를 밀어 넣거나 따라가지도 않을 거야.
난 완전히 네 옆에 함께 있을 것이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는 함께 발견하게 될 거야. 


좀 추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지금 내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말이었다.

단정 짓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자, 과도하게 염려하지 말자. 

그렇게 되면 오늘처럼 내가 밀어 넣거나, 내 속도와 시간대로 아이를 재촉할 테니까.
인사하라고 인사하라고 넌 왜 인사도 못하냐고 화가 날 테니까.
믿고 기다리면 아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걸 봤을 텐데.


그냥 아이가 지금 할 수 있든 없든 믿어주며 기다려주자.
너의 어떤 모습도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으로 존중해 주며, 믿어주는 엄마가 여기 있다는 걸 편안하게 전달하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네가 지금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네 안에 얼마나 보석 같은 면들이 있는지,
너는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너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그걸 너만의 방법으로 헤쳐나갈 것인지.

불안이 아니라 믿어주는 시선으로 널 보고 싶은데..


엄마의 마음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설사 네가 오늘 또 인사하지 못했더라도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는 연습.
가르쳐줄 건 가르쳐주면서 아이는 또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해나갈 것임을 믿어주는 마음의 연습.

그래야 한 발짝 떨어져 너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너의 아주 사소한 변화도 알아채서 너에게 칭찬과 격려로 돌려줄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재촉하지 말아야지, 불안해하지 말아야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아야지.
아이는 아이만의 속도대로 자라고 있고, 노력하고 있음을 진짜로 알아주고 믿어주는 엄마가 돼야지.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내가 살아온 전체 인생을 놓고 봤을 때 엄마가 된 지 겨우 49개월 됐을 뿐인데,

부끄럽고 미안하더라도 그럼에도 실수를 알아챌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더디지만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아주고 존중해 주고 싶다.

오늘 또 인사를 바로 하지 못했고, 오늘 또 딸을 재촉했을지라도
중요한 건 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흔들었다는 것이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더 믿어주겠노라 결심했다는 것이니까.

이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인사를 넘어서 친구들과도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재밌게 노는 날이 오겠지!

우리 오늘도 파이팅!





+ 집으로 왔더니 곧 선생님의 키즈노트 알림이 왔다. 행복이가 크리스마스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발표를 하고 싶어 해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진짜, 나 도대체 뭘 그렇게 걱정했는지 다시 한번 웃으며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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