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도 혼자서 먹을 수 없고, 기저귀가 찝찝하다고 기저귀를 갈 수도, 혼자서 용변을 볼 수도 없다.
무언가 불편할 때 아직 말을 못 하는 아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온 힘을 다해서 우는 것 밖에 없다.
오늘 하루 유독 칭얼대는 아기를 계속 안고 있느라 밀린 빨래를 하지 못했다.
아기 손수건이 바닥을 보이고, 갈아입을 옷도 하나밖에 없다.
아기 옷뿐인가, 나도 남편도 속옷이 떨어져 간다. 오늘은 반드시 빨래를 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바쁘고 귀찮다고 옷을 마구잡이로 빨래통에 넣어놔서, 이걸 또 분류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아무리 빨리해도 한 주간 밀린 널브러진 빨래를 정리하는 데 5분은 걸릴 거 같은데 과연 이 시간을 우리 아기가 기다려 줄 것인가. 눈치를 보다가 괜찮아 보이길래 "엄마 빨래하고 올게!" 하고 후다닥 세탁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아니나 다를까 "응애" 하고 또 울어 젖힌다. 엄마를 찾나 보다.
마음은 급해지고 입도 계속 움직이며 말했다.
"복댕아~ 복댕아~ 엄마 빨래하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갈게~"
당연하게도 이렇게 말하면서도 애기가 엄마 말을 알아듣고 울음을 딱 멈추고 "그래 내가 엄마를 기다릴게."라고 하는 걸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 목소리에 아기가 안정되길 바랐다.
이런 엄마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아기가 더 크게 자지러질 듯이 운다.
아니,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갈 거고, 엄마가 금방 간다고 했는데도, 마치 엄마가 사라진 것처럼 이 집에 자기 혼자 남겨진 것 마냥 엄청나게 울어댄다.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아기의 소리에 결국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달려갔다.
후다닥 아기를 들어 올려 안아주며, "괜찮아 복댕아. 엄마 왔잖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인상을 구기던 아기가 헤벌쭉 웃는다.
내가 우리 아이의 자기 대상으로 기능하는 순간이다.
자기 대상이란 "자기의 일부로 경험되는 대상으로, 자신의 요구에 반응하면서 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자기 대상>은 나에게 온전히 반응 하주며,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걸 대신해 주는 사람이다.
원래는 크면 자기가 스스로 해야 되는 거다.
조금은 힘들어도, 지루해도, 배가 고파도, 찝찝해도 괜찮다고 견뎌보고, 위로해보고, 해결할 수 있는 것.
근데 아기는 이걸 못한다. 그래서 자기 대상인 엄마가 대신해 주는 거다.
아기는 엄마가 빨래하러 가서 심심하거나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엄마가 없어져서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기는 스스로 진정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밀려올 때 스스로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를 진정시켜주고 내 이상한 기분을 해결해 줄 자기 대상인 엄마를 온 힘을 다해 부른다.
그럼 자기 대상인 엄마는 달려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토닥거리며 신체적인 안정감을 줄 뿐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감도 제공한다. "아구 복댕이가 엄마가 없어져서 찾았어요~" 하면서 공감해 주고, "그래서 이렇게 크게 울었어요~" 하며 반영도 해주고, "이제 엄마 왔지? 괜찮아 괜찮아"라며 위로해 주고 안아준다.
아기는 참 연약하다.
그러니 어릴수록 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부모는 더 공감해 주고, 안아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 같다.
아기는 부모로부터 이렇게 위로받고, 공감받고, 사랑받은 경험을 먹고 자란다.
수도 없이 자기 대상인 부모와 맺은 반복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마침내 아기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간다.
자기 대상으로부터 따스하게 위로받아야 되는 순간에 비난을 받았거나, 그 상황에서는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에 공감받기보다는 무시당하고,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는 그 시기에 부모가 무심했다면,
아이는 커서도 자기를 비난하고 무시하고 무심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해주지 않았기에 자기를 위로할 수 있는 능력도,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아이의 안에서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아기에게 자기 대상은 그 무엇보다도 정말 필요하다. 아직 어린아이가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대신해주는 사람.
밥을 먹어야만 키와 몸이 커지며 자라날 수 있듯이, 자기 대상으로부터 오는 따스한 공감과 위로를 먹어야 심리적으로도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다. 그래야 나중에 커서 자기 대상에게 보고 배운 대로 자기가 그 기능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아이와 나, 단둘.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놀리며 아기에게만 맞춰 흘러가는 내 하루의 시간.
아이를 돌보기 위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먹고, 우사인 볼트인 양 엄청나게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한다.
애가 울고 칭얼거리면 가서 온갖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아이를 달래도 보고, 그래도 안되면 "아고고"소리를 내며 들어 올려 안는다. 네가 기분이 좋다면야 팔이 빠져라 안아주고 흔들어준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내 아이의 자기 대상이 되어주었다.
자기 대상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엄마 밑에서 아이가 얼마나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는지 알기에 멈출 수가 없다. 아마 나뿐 아니라 모든 부모가 그럴 것이다.
그리고 후일 성장하여 네 스스로 충분히 많은 걸 해낼 수 있을 때라도, 네가 힘들 때나 기쁠 때 모든 순간마다 엄마는 잔잔히 네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알아주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이 자기 대상의 욕구가 심어져 있다.
어느새 어른이 된 나도, 엄마가 된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무나도 힘들 때 나를 위로하고 이해해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고,
내가 뭔가 잘 해냈을 때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에, 어쩌면 이 자기 대상의 욕구는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포기되지 않는 욕구인 것 같다.
그냥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 나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해 주는 사람.
말이든 눈빛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든지 나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여주고 "내가 이만하면 괜찮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라고 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오늘은 어땠어? 하루 참 수고 많았지?"
"밥은 잘 먹고 있어? 잘 챙겨 먹었으면 좋겠어."
"아기 보는 게 얼마나 힘든데, 너 참 애쓰고 있는 거 내가 다 알아."
내 하루의 끝,
혼자 고군분투하며 애썼던 나의 수고를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고, 위로해주는 나의 자기 대상과의 대화는 내가 살아나갈 힘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육퇴를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라도 소통할 수 있는 자리로 부단히도 나아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