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지쳤기에 그 말에 화가 나서 따지고 들었다. 그랬더니 그냥 자기 마음을 얘기한 거라고 진정하라며 방에 들어간다.
처음엔 씩씩거렸다, 아니 그럼 알아서 잘하면 될 거 아닌가?
양으로 따지고 보면 내가 훨씬 더 일을 많이 하는데?
억울한 건 나 아닌가?
하지만 육퇴 후 차분히 나의 시간을 갖고, 기도하며, 하루를 또 내가 남편에게 했던 언행들을 관찰하고 돌아보니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행복이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더딘 기질을 소유한 두 사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이지만, 나로서는 참 맞추기 힘든 속도를 가진 두 사람이다.
나는 정말 빠르다. 멀티태스킹에 능하고, 어떤 일이든 초집중해서 금방 해버린다.
맡은 일들을 해야 하면, 머릿속으로 절차를 미리 그려놓고 불같이 해버린다.
게다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미루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다. 일단 해야 한다.
그런 나에게 여유롭고, 느리고, 천천히 가는 모습은 불덩이를 마음에 던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답답해서 타오른다. 재촉하고 싶고 빨리빨리를 외치고 싶다.
상담사로서 현장에서 수백 쌍의 부모 자녀 관계의 기질 성격검사를 진행하고, 해석하고, 상담하며 내가 늘 하던 말이 있었다. "기질은 다 좋아요, 아이의 기질을 다 좋게 여기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로부터 아이는 자신감 있게 성장해 나가지요."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
그래서 아이에게는 겨우겨우 엄청난 모성의 힘을 빌려서 인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남편을 존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이는 다 볼 텐데,
자기에게 대하는 엄마의 태도뿐 아니라, 아빠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도 바라볼 텐데.
엄마가 자꾸 아빠를 재촉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는 뭘 배울까.
자신에게는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천천히 해" 하면서 아빠에게는 "빨리빨리, 이것도 빨리!"라고 하는 엄마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까.
무엇보다.. 남편은 정말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늘 같은 날은 나 스스로에게 참 부끄럽다.
여유가 없어 남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하지 못해 그저 미안하다.
인간중심상담에서는인간은 누구나 긍정적인 존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긍정적인 존중을 받기 위해 성장 과정에서 부모를 포함한 중요한 타인들의 가치 조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적으로 부여된 가치 조건에 따라 살아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아 개념과 진짜 자기 경험 간에 불일치가 발생하기 쉽다. 만약에 이렇게 형성된 자아 개념과 현재 경험 사이의 불일치가 커지면 그 결과로 우린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곧 심리적인 부적응 상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 중심 상담에서는 가치 조건으로 형성되어 위축되고 왜곡된 자아 개념을 더 확장시키고 융통성 있게 변화시키도록 돕는다. 나의 경험을 믿으며 타인이 기대하는 "내"가 아닌 "진짜 나"로 살아가도록 돕는다.
이를 위한 태도 중 하나가, 상담자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다. 이 태도는 상담자가 내담자를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의 인격 그 자체로 존중하고 수용하는 태도다. 내담자의 어떤 행동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경험도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게 된다.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이 얼마나 어려운 태도인가.
그럼에도 지금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태도인가.
지금 나는 내 속도를 자각하고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빠른 게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결과적으로는 빠르나 천천히 가나 비슷하다.
내가 원할 때 안 해서 그렇지, 결국 남편은 하긴 한다. 언젠간....................
지금 나는 청소를 하나 더 하는 것보다, 빨래를 한 번 더 돌리는 것보다 그저 내 가족을 더 존중하는 것에 더 힘을 쏟아야 할 때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지 않으면 좀 과장해서"여유롭고 천천히 가는 진짜 나"보다는 엄마가 아내가 바라는 "빠르고 효율적인 것이 좋은 가짜 나"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갈 수도 있지 않겠나.
그저, 우리 가족이 속한 곳이 "진짜 나"로 살아가도 되는 가정이길 바란다.
남편에게는 내가 얼마나 빨래를 많이 돌렸나 보다,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고 믿어주었는지가 남을 테니까.
딸에게도 엄마가 집을 얼마나 깨끗이 청소했나 보다,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존중하며 대했는지가 남을 테니까.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아빠도 존중하며 대하는 엄마의 태도로부터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감 있게 나아갈 테니까.. 천천히 가더라도 나는 잘할 수 있다는 걸 믿을 테니까.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무조건 긍정적으로 존중해주는 그런 가족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밤 나에게도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과 공감을 해준다. 부끄럽다는 결과가 아닌 노력했던 내 마음의 과정을 알아준다.
나는 나대로 참 답답했지?
나도 할 것도 많은데.. 얼른 육퇴를 하고 글을 쓰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지?
그냥.. 깨어 있을 때 대부분의 집안일은 마치고 싶었을 뿐이었지?
나도 잘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알아. 좋은 의도로 그랬다는 것도 알아.
나는 이렇게 너를 관찰하고 생각해 보며 변화되기까지 노력하는 네 모습이 자랑스러워, 충분히 멋있어. 완벽하진 않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부인이고 또 엄마야.
그러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좀 느리게 간다 해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속은 상하겠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단 걸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