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2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취업 도전기

by Happyman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취업 도전기

본격적으로 실업자 생활을 시작하고 있을 때 빠른 시일 내에 취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못나게 산 것도 아니고 무능력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취업이 될 줄 알았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코로나 19가 줄어들기보다는 점차 확대될 뿐이었다. 인근 지역의 많은 지역 주민들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격리생활을 하고 있는 소식이 매일 나타나고 있었다. 가고자 하는 기관인 경우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감염 확대 우려로 인하여 도리어 기관을 운영을 정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각 기관들은 평소보다 사람을 덜 뽑았다. 더더욱 부장으로 일했던 나는, 관리자로서 일했던 나는 직급에 맞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고 힘들었다.

사실 직급을 낮춰 새롭게 일할 자신이 솔직히 없었으며, 전 직장에서 당당히 나왔었는데 결국 더 안 좋은 여건에서 일하는 나를 보는 그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돈도 돈이지만 그들 때문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좋은 곳에서 일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통 알맞은 자리가 나오질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취업 사이트를 수백 번 들어가 찾아봐도 적당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우연히 지인 분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셨다. 지금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먼저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일자리 추천을 위해 전화를 걸어주셨다.

“어디에 자리가 났는데, 한번 일할 생각이 없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연결해 주셔서 감사함을 전하고 당연히 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당황스럽게도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취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빨리 취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처구니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게 되니 나는 더더욱 비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될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안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충격이 평소보다 크게 느껴졌다. 하늘에서 주어진 기회였는데 바보처럼 그것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그리고 될 것 같았는데 되지 않는 이러한 반복적인 삶이 너무 싫은 것 이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그런 마음조차 어느새 잊혀만 갔다.

문 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왜 이런 일들이 나한테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깊이 빠졌다면, 이유 같지 않는 이유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실업자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조금이나마 이해되기보다는 그저 낭떠리에 떨어지는, 더 깊이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안쓰러운 내 상황이 그저 비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립된 이 상황에서 나는 결국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을 이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버스는 벌써 지나갔습니다!’

‘포기해 버리세요!’


어설픈 경력 탓하기

이번 채용 참여뿐만 아니라 채용 사이트에서 나오는 데로 즉시 채용 서류를 접수시켰다. 그런데 서류 심사에서 탈락되는 경우도 있었고 면접 과정까지 참여하였지만 결국 떨어지는 당황스러운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원했던 직급을 내려놓고 좀 더 아래 직급으로 채용에 응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내가 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일을 평생토록 아님 장기적으로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하니 불안함도 함께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채용공고에서 낮은 직급을 뽑는 회사도 응시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존 경력을 인정해주었는지 서류 심사는 대부분 합격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런데 면접 과정에서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문제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때론 면접 과정을 잘 준비 못해 면접을 잘못 보기도 했지만 부장까지 일한 사람이 훨씬 낮은 팀장 자리에 응시하는 것을 매우 의아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면 매우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경력을 인정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오랫동안 일을 하게 될 텐데 그들보다 높은 경력을 가진 팀장이 오게 되면 나보다 낮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과장이나 부장이면 얼마나 내가 부담스럽겠는가? 또한 높은 경력자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급여를 주는 것도 솔직히 부담이 될 듯했다.

우연히 부장 채용에 응시하게 되면 나의 도전에 감명을 받았는지 서류심사를 통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회사의 면접 과정에서 면접을 매우 잘 보았다고 해도 부장을 수행할 만한 경력이 매우 부족하게 여기거나 만 40이 안된 나를 매우 어리게 보기도 하고, 부장으로서 원활하게 잘 업무수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큰지 매번 떨어지는 경우가 정말 많았었다.

“그럴 거면 왜 면접까지 볼 수 있게 하는 거야?”

결국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설픈 경력 때문인지 기존 자리에 맞는 때론 보다 높은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없었고 낮은 직급의 자리에서 일하고 하는 겸손한 마음은 컸지만 현실은 그렇게 나를 받아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할 수 있을 거라는 큰 기대감과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점차 불합격이 되어 보니 점차 자신감이 떨어지고 나의 상황이 매우 불안하게 느껴졌다.

항상 이랬다. 빨리 취업을 할 줄 알았는데 상상하지 못하는 이런저런 일들로 인하여 취업하기 더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대단했었는데 점차 불합격의 경험을 해보게 되니 점차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다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러한 현장보다는 전혀 다른 낯선 현장에서 취업 자리를 찾고자 아마 헤매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정말 어디서 일할 수 있을까? 어디를 가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려운 광야의 길을 건너갈 때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이 너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나의 삶 속에서 희망도 빛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삶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낫겠구나 라는 생각만 들 정도였다.

이 정도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겨 어쩔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내가 과거에 그리 못된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꼭 혼을 내는 듯 한 기분이었다.

남들의 위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오해만 더욱 쌓일 뿐이었고 더욱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나의 자리를 알아봐 주기 위해서 노력을 해주었지만 시국이 시국인 만큼 예전처럼 보다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조차 너무 감사한 일인데 결론적으로 안 되고 실질자로 계속 살다 보니 그들을 향한 많은 미움과 원망도 컸고 섭섭함과 힘들어함도 함께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왜 나만 이런 일들이 줄기차게 나타나는 걸까? 그저 나에게만 탓하게 되었고,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저 죽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어 혼자 남게 되었을 때는 그 시간이 너무 두려웠다. 나에 대한 좌절감,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감, 세상과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상황 모두가 나를 계속 힘들게만 했다.

그냥 포기해 버릴까라는 생각을 수백 번 수천 번을 한 것 같다. 내 눈 앞에 있는 자식들과 아내가 생각이 나서 생각을 고치고 또 고쳐보지만 벌써 낙심된 내 마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그 길로 가는 듯했다.

작은 불빛 하나, 작은 희망이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나만 왜 이리 힘드냐며 소리를 질러봐도 들려오는 것은 나의 목소리뿐이었다. 원망하고 화를 내도 돌아오는 것은 나의 마음에 새겨진 큰 상처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상황을 원망하면서 그저 정말 길이 있을까? 내가 그 길을 갈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만 반복적으로 했었다.


나름 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되지만 나도 남들만큼 열심히 살아온 것은 맞다. 늘 어느 자리이든 리더의 역할을 다했고, 높은 성과를 통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칭찬을 줄 곧 받아온 사람이었다.

좋은 대학교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학교 동기 중에서는 그나마 잘 나가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직장인으로서 탄탄대로 걸었고, 직장인으로서 대학교를 4년 연속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하였고 1급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취업이 남들보다 늦었지만 높은 취업률 속에서 당당히 취업을 하는 등 남들 못지않게 탄탄대로 걷는 사람이었다. 외부 공모사업도 제법 많이 받아왔고, 외부 공모사업의 성공신화를 만들면서 제법 많은 곳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난생처음 책을 쓰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책도 출간하기도 하였다.

내가 봐도 거침이 없었고, 어려움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왔던 내가 졸지에 실업자가 되니 처음에는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만 말았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나보다 더 멋진 삶을 꾸며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참 많았고, 절대 자랑하지 아니하고 그저 자기의 삶에 대해 늘 감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각자의 삶에서 충실할 뿐이었고, 각자 자기 덕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겸손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겸손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헐크 아저씨

가장 먼저 밀려오는 것은 두려움보다 원망이었다. 나를 이런 어려움에 빠진 기존 회사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나의 상황을 알면서도 돕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린 그 사람들이 너무 미웠다. 나의 마음을 좀 위로해주기를 바랐는데, 그저 나를 떠난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나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모든 일들을 꺼내놓고 그들 때문에 내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거라는 생각만 가득하였다. 그런 생각이 가득하다 보니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약을 먹어도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점차 그들을 향한 미움이 점차 커지기만 했다.

원망이 커지니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잠을 이룰 수 없으니 매사 민감한 사람으로 변화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너무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민감하게 말하고 민감하게 행동을 한 것 같다.

평소에 잘 정리를 못한 가족들인데도, 흩어진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야! 빨리 정리 안 해? 정리 안 하면 아빠가 화낸다!”

“자기야! 왜 저렇게 정리를 못하고 쓰레기는 왜 쓰레기통에 넣지 않는 거야?”

“장난감 정리하지 않으면 싹 다 갔다 버린다!”

소리를 지르고, 언성을 높이면 자식들이 100% 운다. 그러면 왜 우냐고 달래는 것보다 더 큰 목소리와 화내는 목소리로 아이들을 또 혼냈다.

같이 아이들을 봐줘야 하는데 ‘나 지금 힘들어!’라는 생각이 컸는지 방 안에 콕 밖에 있으면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아내에게 (투명스럽게) 나 뭐해야 해! 그러면서 거절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내 상황을 알면서 저렇게 부탁하는 아내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집에만 계속 있으면 답답하기만 해서 지인을 만나러 서울을 가야만 했다. 광역버스를 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제법 늦게 버스가 도착했다. 당연히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버스가 서질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를 못 봤나?”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들어서 달라고 큰 몸짓을 했고 결국 아저씨가 보았는지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차를 탑승하는 순간 버스 아저씨 매우 퉁명한 말투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저기 시내 쪽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요! 잠실 가는데요! “라고 답했더니 아저씨가 하는 말....

“반대편에서 타시라고요!”

듣는 사람 참 민망하게 이야기를 하길래 갑자기 나도 모르게 아저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왜 이리 불친절한 거야?”

아저씨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문을 닫고 떠나는 버스를 향해 큰 소리로 욕을 해가면서 삿대질을 하는 등 나는 분노의 마음으로 2차 공격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큰일이 아니었고 그냥 지나칠 일임이 분명했는데도 내 마음과 상황이 편치 않아서 인지 매우 민감하고 분노에 찬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은 괜찮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어느 날은 만사가 귀찮고 민감한 사람으로, 헐크로 변신하여 주변을 박살 내려하고 있었다.

‘조금이나 건드려봐!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네... 다들 죽 XX’


오지랖 넓은 아줌마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오늘날에도 종종 쓴다. 그런데 이 말이 그다지 좋은 뜻은 아니다. 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몸이나 다른 옷을 넓게 겹으로 감싸게 되는데, 간섭할 필요도 없는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 ‘오지랖이 몇 폭이냐?’고 비아냥거리며 묻기도 한다. 그런데 오지랖이 넓다는 것은 가슴이 넓다는 말이다. 즉 남을 배려하고 감싸는 마음의 폭이 넓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지랖이 넓은 것이 미덕이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서 남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 이를 경계하여 ‘오지랖이 넓다’고 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지랖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 사전, 박남일)

아파트에 산지도 언 10년이 넘어간다. 아파트에 살면 좋은 점도 많지만 사실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층간소음으로 인한 주민 간의 어려움이었다.

웬만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끼리 싸우기보다 이해하는 것이 많았다. 일일이 지적하고 싸우면 결국 나만 손해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았었다.

밤 10시가 넘었던 걸로 기억된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스크린을 보니 아랫사람인 듯했다. 갑자기 전화가 울리고 혹여나 아이들이 깰까 봐 전화를 급히 받았는데 단단히 마음을 먹음 듯한 목소리, 단호한 목소리로 너무 층간소음이 나서 잠을 잘 수 없고 스트레스를 받아 약을 먹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다 이해를 하려고 하고,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부분도 있어서 죄송하다고 하며 마무리를 지으려고 할 때쯤 그 이상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면서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세요!”

그러면서 한 가지의 말을 더 한 순간 나는 폭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요즘 일 다니지 않으시잖아요! 지금 일을 하지 않아서 평소에 너무 시끄럽게 걸어 다니잖아요!”

화가 나고 속상을 해도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하니 참다못해 소리를 지르고 싸움을 하게 되었다.

“당신이(?) 뭔데 내가 지금 일하냐 마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참 신기하기는 하다.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오후쯤 둘째가 유치원에서 올 시간에만 나가는데 내가 일을 하지 않는 걸, 실직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줌마의 오지랖은 참 놀랍기만 하다)

사실 그 아줌마는 그 이야기가 요점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의 현재 상황이 초라해서 그런지 사소한 이야기가 나의 마음에 불을 질었다.

정말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게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내가 알고 있는 욕을 합쳐 가면서 오지랖 넓은 아줌마와 대판 싸움을 하였고 결국 아줌마의 사과를 통해 크게 번질 싸움이 어느 정도 일 달락 되었다.

‘사람들이 왜 이리 나를 무시하는 거야!’

싸움 끝은 나의 승리로 끝났지만 뒷 끝은 좋지 만은 않았다. 화가 덜 풀렸는지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또 다른 복수를 해야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늘 민감한 아이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툭 건드려도 터질 것만 같은 그런 사람,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의 위로도 그저 화날 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면 깊은 속에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고, 나에 대한 열등감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나를 보여주고 싫은 나름 나의 방어막이 아니었나 싶다.


눈치챈 아들

실직을 하고 나서 절대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지 말며, 어떠한 불행한 모습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어느 누가 나한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가 아빠가 일을 하지 않고 실직자라고 알면 매우 불안해하니까 절대 아이한테 이야기하지 말어!”

정말 아이들이 알아서 걱정하고 두려워할까 봐 조심조심 말하고 행동을 하였다. 며칠간은 휴가로 직장에 가지 않는다고 핑계를 댔다. 그저 아이들은 아빠랑 놀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는지 한동안은 참 좋아했다. 그런데 안 나가는 일수가 많아지다 보니 휴가 핑계되는 것도 어려움이 있었다.

두 번째로 코로나 19로 인하여 회사에서 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고(재택근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참 민망한 것은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지 않으니, 아파트 단지 내에 사는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자기 아빠와는 다르게 계속 집에 있는 친구의 아빠를 보니 아주 쉽게 눈치를 챘을 것 같았다.

너무 눈치도 보이고 민망하기도 해서 우리 집으로 놀러 온 아이에게 조금만 놀다 가라고 약간은 무섭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적도 많은 것 같다.

아내와 아이들과 차를 타고 밖으로 외출하는 중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첫째가.....

“아빠 지금 일하지 않고 있는데, 왜 저번에 다니던 서울 사무실 왜 안 보여줬던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 조차 참 놀랐다. 나는 너무 놀라 차를 갑자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물어봤다.

“아빠 일 안 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응 저번에 아빠가 이야기하던데?”

큰일이었다. 첫째 아이가 알아버린 것이었다. 절대 나는 아이에게 내가 지금 일하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계속 집에만 있고 평소와 다르게 출근을 하지 않고 있으니 늦기는 했지만 결국 첫째 아이가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스스로 너무 창피하고 민망하였다. 항상 멋진 아빠라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일 못하고, 일 안 하는 아빠로 혹여나 생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참 많이 창피하였다.

또한 아이가 혹여나 불안해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누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가 불안해하며 슬퍼하고 깊이 걱정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가 어찌해야 할지 참 막막했다.

너무나 걱정도 들고, 어떻게 보면 어떻게 아이에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아이와 솔직한 대화가 필요했다. 만약 아이가 불안 해 한다고 따뜻하게 안아줄 생각이 컸다.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었다.

일부러 첫째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었다. 차로 10분 정도 거리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내가 불편해하고 걱정했던 것들이 실제 느끼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걱정한 만큼 그렇게 고민하고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저 섭섭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는 아빠랑 놀고 싶어서 아빠 방에 가면 아빠는 들어오지 말고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해서 정말 속상했어!”이라고 이야기를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10살밖에 안 된 아들이기도 하고, 아직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나이는 아닌 듯했다. 아빠가 일을 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앞 미래가 두렵다 라고 생각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저 나만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 같았다.

그저 울 첫째 아들은 항상 집에 있는 아빠와 어떻게 신나게 놀지만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첫째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처럼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일지라도 지금의 일들과 상황들을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절대 아들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특별히 어느 때보다 시간이 많음으로 아들이 원하는 만큼 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좀 더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빠랑 어디 가고 싶어?”

아들의 대답은 정말 쿨 했다.

“아빠랑 낚시하러 가고 싶어!”

그런데 아들의 뒷 이야기가 더 웃겼다.

“아빠 낚시를 하고 싶은데, 멀리 가서 낚시를 하고 싶지는 않아 특별히 바다낚시 말이야!”

낚시를 정말 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저 아빠랑 놀기를 원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제야 알게 된 우리 아들로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나 어느 누구에게 민감하게 하지 말아야 했다. 집에 누워서 게임만 하는 아빠가 아니라 무엇인가 능동적으로 하는 바쁜 아빠가 되었어야 했다. 아들이 원하는 아빠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실직으로 인하여 아들에게 못난 모습은 보여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집에서도 아무런 옷을 입지 않았다. 속옷 차림도 아니고 잠옷 차림도 아니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것 같은 직장인의 모습처럼 옷도 그렇게 입고 있었다.

혹여나 아이가 상처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몸도 마음도 훑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어느 날에도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아이 때문이었다.


하늘이 주신 귀한 선물

현재 아들 둘이 있다. 솔직히 딸을 원했으나 어쩌다 아들 아빠가 되었다. 자식이 둘이 있는지라 혹여나 딸이라고 확신과 자신이 있다면 어떻게든 셋째를 도전했을 텐데 그것도 모르는 것이기에 혹시나 아들 셋이 되면 큰 일이기에 셋째는 꿈도 꾸지 못했다.

딸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딸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아들과는 분명 다를 거고, 이쁜 짓 많이 하고 애교가 넘치는 딸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조차도 장난꾸러기 아들 때문에 체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아들 덕분에 힘든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살짝은 딸을 원했고, 딸만 생기면 정말 경험하지 못한 세계, 천국 같은 삶이 펼쳐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지속적인 실업자 생활을 하다 보니 세세한 것 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언제는 아내가 엄청 아파 보였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힘들어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며칠 뒤 카톡을 통해 하나의 사진을 아내가 발송하였다. 무엇인가 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바로 볼 수 없었고 몇 분 뒤에 아내가 보낸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은 바로 “임신테스트기”였다. 두 줄이 선명한 임신테스트기였다. 나는 바로 보자마자 아내를 찾았다. 그리고 너무 기쁜 마음으로 아내를 안아주었다.

“고마워 자기야!”

나는 정말 기뻤다. 지금 너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하늘에서 위로를 주는 듯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키울 걱정스러운 생각보다는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드는 한 분이 계셨다. 그건 바로 장모님이었다.

장모님은 아내가 아들로 인해 충분히 고생하는 걸 아셨기 때문에 괜히 장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고, 시험 성적을 아뢰듯 어떻게 이야기하실지 혹시나 실망하시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실까 이만저만 걱정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걱정하는 것과 달리 장모님은 축하한다고 말씀하신다. 딸이면 좋겠지만 아들도 괜찮다며 셋째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다.

실업자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기쁨 소식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 가정의 기쁨 소식을 널리 널리 전했다. 대부분의 반응은 축하하는 메시지였고, 직접 전화를 주면서까지 셋째 임신을 축하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직접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나의 상황을 아는 몇몇의 사람들은 염려 섞인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지금 실업자인데, 어떻게 아이를 키우겠냐는 염려 섞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상관이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셋째 임신 자체가 너무 기뻤다. 또한 아내에게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내의 입덧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고 임신기간 동안 힘들지 않도록 세세한 살림들도 직접 도맞아 했다.


현재 개구쟁이 아들이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솔직히 딸이기를 바랬다.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려 줄 수 있는 이쁜 딸을 기대하기도 했고 아빠의 마음을 녹여주는 애교 많은 딸을 조금이나마 기대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지 않는가? 그저 바라는 것뿐이지 솔직히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자주 하곤 했었다. 기도의 말미에는 가능하다면 아들보다는 딸로 주세요라고 살짝 기도는 했었지만, 어느 성별이라도 좋으니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예전과 다르게 성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어서 아내가 임신한 지 4개월 이후에 산모와 아이의 건강 체크를 위해서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의 병원 방문은 직접적이지 않지만 어떤 성별인지 조금이나마 힌트를 받을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긴장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는 날이었다. 사실 아침부터 초긴장 상태로 있었고 급히 준비하여 병원에 재빠르게 가게 되었다. 대기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갑자기 담당 의사가 수술하러 갔는지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대기하는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담당 의사가 돌아왔고, 바로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지 산모의 건강 상태부터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솔직한 마음을 의사에게 전달하면 혹여나 창피한 상황에 놓일까 봐 숨죽이고 의사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이 간 아들 녀석이 여간 답답했는지 의사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이렇게 직접 대고 얘기를 하는 아이였구나 라며 참 당황스러우면서도 참 의아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의사는 셋째의 성별을 이리저리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쁜 아이네요! 화면을 보니 아들의 모습보다는 이쁜 공주님인 것 같네요!”

직접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딸이라는 힌트를 받는 순간 나를 포함한 두 아들들과 검사를 받고 있는 아내마저 소리를 얼떨결에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기쁜지 아내를 진료해주는 의사 선생님께 연겊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의사 선생님이 딸을 준 것이 아닌데 말이다.

10년 동안 기다렸던 딸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이 들었던 아내의 표정도 매우 좋아 보였다. 아내도 은근히 딸을 원했던 것 같다.

딸이라고 하니 너무너무 기뻤다. 나는 지금 실업자인데도, 그런 상황 조차 정말 잊어버린 상태로 그저 행복과 기쁨에 벌써부터 취해있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 딸의 소식을 전했다. 무엇보다 많이 기대하고 있었던 어머니와 장모님이 너무 기뻐하셨다. 그들도 딸을 키워보셔서 그런 건지 딸의 필요성을 충분히 알고 계신 듯했다. 무엇보다 딸로 인해 아내가 덜 힘들어질 것이라며 자기 일처럼 너무 기뻐하셨다.

하늘이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예상도 못한 딸이 우리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이 힘들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너무 컸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다시 일어서야 하며, 작지만 해야 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셋째가 생기고 더더욱 그렇게 바라던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서 새롭게 태어날 딸을 위해서라도 조금이 나라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적으로 힘들다고 이야기만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게라도 행복을 찾고, 넘어지는 것보다 다시 일어서고자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셋째의 딸 소식을 통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에 온 셋째가 하늘에서 준 선물 맞지요?”


고통스러운 삶의 끝자락

어느 날은 좋더라도 어느 날은 너무 힘들 정도 우울했다. 어느 날은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7~8년 된 것 같다. 연세가 많기는 하시지만 매우 장수하시며 살고 계셨는데 갑자기 마당에서 넘어지셔서 고관절 수술을 급히 하게 되셨다. 그런데 고령인지라 고관절 수술 회복 속도가 늦어졌고 이런저런 합병증으로 인하여 요양병원에 입소하게 되셨다.

요양병원에 입소한 지 7~8년이 되어가셨도 틈틈이 부모님을 모시고 외할머니를 뵈러 갔었고 최근 들어 몸이 급격히 좋지 않으셔서 가족 모두가 임종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구질구질한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임종의 소식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하셔서 그러신 지 어머니는 그저 담담히 말씀을 하시는 듯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장례식장을 갔다. 침울한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언제 가인 경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셨는지 모든 식구들은 모두가 담담히 장례를 치르셨다.

가족 중 장례가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맞지만 일부러 전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인분들을 부를 자신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늘로 보내드리면서 나 또한 깊은 우울감이 밀려왔다.

“왜 나는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걸까?”

나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초라한 내 모습도 모습이지만 이제야 보니 아무도 없는 그 상황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과 나의 실직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과 모든 상황들을 나의 실직과 연결 짓고 있었다. 그냥 스쳐가는 일들인데도 연결 지어 확대 해석해버리는 내 모습이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힘든 마음에 다양한 상황들을 덧입여 상황과 나의 마음을 더 최악으로 몰고 가는 듯하였다.

점차 끝자락까지 나를 깊이 구렁텅이로 몰고 갔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상 삶이 그런 듯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 최고인 것 같고, 나만 제일 힘든 것 같고, 나만 최악의 일을 겯고 있다고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힘들면 희망을 찾고 어떻게든 일어서야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한번 힘들어보고 최악의 상황에 놓여보셔라. 희망을 찾아 나아가는 것보다 어떻게 보면 포기해 버리는 것이 더 빠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거라고..

방법이 없다. 한 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옴 살 달짝 못하는 지경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어떠한 위로가 되겠으며,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2화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