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잡대인데 번역 잘하네????? (쓰면서도 오글토글....)-
영화 <데드풀>, <스파이더맨>, <보헤미안 랩소디>, <나우 유 씨미>, <캐롤>, <바이스> 등을 번역한 번역가 황석희를 아시나요? 특히 현란한 말장난으로 가득한 <데드풀>이나 미국식 유머와 독설로 가득한 <바이스>는 그의 번역으로 인해 빛을 발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화려한 커리어와 실력을 자랑하는 이 번역가에게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https://news.v.daum.net/v/20210827225601336
‘지잡대’ 나왔는데 번역 잘한다는 난데없는 말에 황석희 씨는 깔끔하게 대처해냈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시 캡처 이미지로 돌면서 당사자가 다시 비속어와 함께 화풀이 DM을 날렸고, 진지하게 받아치기 시작한 겁니다.
욕설과 화풀이, 무례함과 무지함에 찬 질문과 답변이지만, 그 개인의 인성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인지 들여다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데? 하는 생각 때문에 심난해질 겁니다.
입학성적이 높은 학교에 재학 - 높은 능력 - 높은 지위(를 가질 자격), 이건 우리가 상당히 지지하고 동의하는 논리입니다. 대학이 디폴트 값이라 생각하고, 대학 안에서도 ‘급’을 나누어서 진학하는 데 모든 청소년기 에너지를 쏟아붓게 되는 기반이죠. 괴로웠던 고 3 시절을 지나게 한 힘은 ‘대학만 가면’이었습니다. 심지어 좋은 대학에 다니면 뭔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거라 기대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더 '급'이 높은 대학에 가면 좀 더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신뢰가 있기에 오늘도 입시는 치열합니다. 대학에 가서도 시험과 자격증, 경력 등 다양한 '스펙'을 쌓기 위해 부지런히 달립니다.
교육을 받은 만큼 개인의 생산성이 증가하기에 그에 따라 소득과 지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인적자본론은 1960년에 발표되어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전 세계 수많은 국가와 개인의 교육에 어마어마한 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얘기는 동시에 소득과 지위가 낮다면 그건 개인의 낮은 생산성에 근거한 정당한 결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배워서’ 내가 갖는 게 맞는 거죠.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데 = 실력(생산성)이 없는데 --> 번역은 잘하네?
라는 흑역사로 박제된 네티즌의 생각은 어찌 보면 인적자본론의 가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발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인적자본론은 상당히 익숙하죠.
하지만 우리가 다들 알다시피 고학력자가 더 높은 실력(생산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 회계 전공 4년대 대졸자와 회계 전공 마이스터고교 졸업 이후 7년 실무자의 월급이 동일하다는 건 두 사람의 실력(생산성)이 동일하다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 대학교 3학년 후 중퇴한 사람과 4년 재학 후 졸업장을 받은 사람 간에는 1년만큼의 임금 차이만 날까요? 교육에 의한 생산성의 차이는 1년인데, 왜 그 이상의 임금 차이가 날까요?
선발가설이론은 '교육을 받으면 능력이 높아진다'는 건 막연한 기대일 뿐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갖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용주들이 얻을 수 있는 근로자들의 능력에 대한 정보가 워낙 적고 직접 확인하기가 어렵죠. 그러다 보니 고학력자는 그래도 나을 거라는 고용주의 기대와 그에 따른 선호도가 반영되어 소득 수준 및 지위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지, 교육을 통해 생산성이 향상되어 나타나는 결과만은 아니라는 거죠. 황석희 씨가 말한 대로 좋은 대학 나오면 대체로 남보다 편한 삶에 안착할 확률이 조금 높을 수는 있어도 그 ‘대체로’에 모두가 포함된다는 장담은 어렵다는 거예요. 심지어 고등학교 성적으로 입학한 대학의 ’레벨‘이 업무능력(생산성)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당황스럽죠.
그런데도 선발 과정에서 갖고 있는 나름의 가설이 있으니 졸업과 이수를 입증할 '증'을 따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는 현상, 그래서 교육이 능력을 의미하기보다 단순한 지위 획득의 증명서, 부수적 역할, 식별 카드 정도로 작용하는 상황에 대해 오죽하면 Dore는 ‘졸업장 병(Diploma diseas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능력이 낮을 것이라는 가설을 실제 제도로 도입하기도 합니다. 많은 기업에서 대학 소재지를 근거로 선발하는 제도를 실제 도입(하려다 걸려서 실패)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묵묵히 이루어 나가는 이국종 교수도 지잡대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대학에서, 대학 졸업 후 얼마나 힘들었나요... 더 좋은 삶을 기대하며 내 실력을 증명하려 애썼으니, 내 월급과 위치가 지금보다는 높을 거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스펙을 따는 것이 내 실제 실력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여전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기대가 확신이 되는 만큼 '지잡대'생이 나보다 높은 실력을 보일 때 빈정거리게 되고, 내가 이른바 급이 안 맞는 대우를 받는 것 같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하! 지! 만!
내가 손에 쥔 '쯩'과 실제 내 실력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너무 낙심하고 분노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좋은 대학이 아니지만 나보다 실력이 좋은 고수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면 흑역사를 피할 수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집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죠. 내가 익숙한 논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 알수록 비로소 겸손해집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도 하는데요. 이건 다음에 같이 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