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계 앞에서 작아지는 나, 이게 뭐라고.....-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아 힘껏 팔을 뻗었을 때 닿을 수 있는 최대 높이는 122cm입니다. 한국소비자원의 2022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키오스크의 85%가 122㎝보다 높게 설치돼 지체장애인의 접근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연적으로는 평등합니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사회지위, 경제, 권력적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연속적인 불평등 구조의 위계에 놓이게 됩니다. 서울에 산다는 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고,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비장애인들 중심의 사회제도와 공공시설 사용에 있어 동등한 혜택을 얻을 수 없을 가능성과 같습니다. 각 영역에서 각기 다른 위치에 놓여있고 서로 다른 수준의 권력을 갖게 됩니다. 특정 기준에 의해 상위 계층에 놓여있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덜 눈치를 보고, 덜 평가받고,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도 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집단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른바 권력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정당한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못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차별이라 부릅니다. 특히 노인의 시기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 능력에 상관없이 겪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인이라는 이유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일상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다른 집단에 의해 ‘대수롭지 않은’ 문제 또는 노인들이 적응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해석됨으로써 노인들의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됩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 되죠.
<키오스크서 20분.."딸, 난 끝났나봐" 엄마가 울었다>
https://news.v.daum.net/v/20210312104414403?x_trkm=t
마음 아픈 딸이 올린 글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연에 공감하고 있죠. 노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살기 위해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맞고, 직원들이 손님이 한참 몰리는 시간에 도울 여유가 없었던 것도 맞습니다만...
씩씩한 막례 할머니도 키오스크로 불고기 버거를 주문해 먹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 높이입니다. 맨 위에 있는 버튼은 할머니의 키보다 터무니없이 높습니다.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아 힘껏 팔을 뻗었을 때 닿을 수 있는 최대 높이는 122cm입니다. 한국소비자원의 2022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키오스크의 85%가 122㎝보다 높게 설치돼 지체장애인의 접근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바퀴의 너비가 있으니 키오스크와의 거리가 멀어서 버튼 누르기가 어렵고, 또 그만큼 손이 닿지 않으니 뜨거운 차나 음식을 받아야 하는 자판기라면 위험천만하기까지 합니다.
✔ 글씨입니다. 영어로 되어 있는 건 메뉴 특징상 그럴 수 있다 쳐도, 한 화면 안에 최대한 많은 글씨를 담음으로써 빠른 시간 안에 주문할 수 있도록 독촉(?)하는 키오스크에서 노인들이 저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을까요? 메뉴 이름은 그렇다 쳐도, 프로세스도 영어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테이크아웃, IC카드..), 누구나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 전제인 거죠.
✔ 정보 전달 방식입니다. 세부적인 항목과 버튼을 찾기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순서나 절차에 대해 직관적이거나 상세한 안내가 없습니다. 다음 단계 버튼을 찾기가 어렵고, 단계도 복잡하죠. 주문할 상품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도 없죠. 키오스크 사용 외 다른 방식은 허용하지 않는 무인화 환경이 확산되면서 정보제공, 오류 정정 같은 모든 상황에서 주문의 권리는 지속적으로 침해되고 있습니다.
✔ 시간입니다. 메뉴를 미리 한 번에 본 상태에서 주문 과정을 밟는 시스템이 아니니 선택부터 결제까지 단계가 깁니다. 당연히 오래 걸리죠. 한 화면 당 조작 시간이 짧으니 맨 처음 화면으로 자꾸 넘어가게 되죠. 터치되는 포인트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주문하고 싶지 않았던 메뉴나 수량을 잘못 체크하거나, 삭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시간이 허비되기라도 하면.... 여러 가지 병의 후유증으로 손이 떨려 터치가 어려운 이들이라면 더더욱.... 첫 화면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내 흑역사야 그렇게 깔끔하게 리셋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점점 뒷사람 눈치가 압박이 되면서 자존감 하락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노인들만 아니면 현재의 키오스크 사용 환경은 문제가 없을까요?
보행 장애인이 휠체어를 사용할 때 앉은키는 평균 93.4cm입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 음성이 나오기는 하지만, 버튼이 어디 있는지, 어떤 메뉴가 있는지, 결제는 어떻게 하는지와 같은 세부 사항이 음성으로 나오기에는 키오스크는 극도로 빠른 주문 속도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신다고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쓰는 사람‘이 왕 아닌가요? 불편한 말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통용되어왔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강력한 무기인 돈이 없어서 소비할 권리로부터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막례 할머니는 현금도, 카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쓰겠다는 사람도 밀어낸다면 그게 오히려 더 비합리 아닐까요? 차라리 비장애인이 ’정상‘ 기준이기에 미처 장애인들의 사용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은 소비를 제한받는 노인과 장애인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사용의 불편함이나 작동 오류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키오스크 도입에만 급급한 기업에 의해 배제되는 소비자에 대한 얘기이기도 합니다. 현재 정부가 제시한 장애인과 노인 접근성 강화 키오스크의 표준 버튼 높이는 120cm입니다. 색약 장애인들을 위해서는 글자와 배경의 명도 차이가 4.5;1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도 있네요.
https://www.khan.co.kr/economy/market-trend/article/202109231513001
여기서 질문받아봅니다!
✔ 꼭 햄버거를 먹어야겠어요? 키오스크 운영 안 하는 다른 음식점도 많잖아요?
먹고 싶은 것을,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력인 자신의 재산을 사용해서 구매하는 것을 제한받아야 하나요? 키오스크 접근성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보다 더 중요한 소비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키오스크 도입이 대중교통, 각종 관공서, 금융기관 등에서도 확대되고 있으니 이런 반문은 좀...
✔ 키오스크 확대는 기술의 발전, 최저임금 상승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노인들도 좀 배워라.
최저임금요? 2019년 기준으로 키오스크 한 달 임대료는 최대 30만 원입니다. 최저임금 8,350원 기준으로 8시간, 주 5일, 주휴수당을 포함한 1인 근로자의 임금은 약 월 175만 원입니다. 둘의 차이는 6배.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키오스크로 인해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물가 대비 ‘최소한’의 임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최저임금 인상이 문제라고 해서도 안 되겠죠.
키오스크 사용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닙니다. 노인들의 디지털 교육도 필요하고 의지적인 태도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키오스크는 소비의 도구인데도 소비가 가능한 모든 집단을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차별의 도구가 되고 있으니 좀 더 섬세한 디자인과 구성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주문 과정이 지체된다 싶으면 뒷사람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잖아요? 모든 집단이 접근하는 데 문제가 없는 ‘배리어 프리‘ 디자인은 전 세계적으로 유망 시장이기도 합니다.
왜 노인 인구의 접근성과 소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키오스크를 개발, 확장 사용하는 것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 운영원리로써 역동성과 생산성은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여기에 앞장설 수 있는 집단이 정상, 보편, 일반 집단이 되고, 노년층, 어린이, 장애인과 같은 집단은 특수 집단으로 규정됩니다. 이 구분이 강력할수록 특수 집단에게 익숙한 상식과 기준은 사회 전체 운영 원리로 채택되기 어렵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역동성과 생산성이 약한 집단에게서 소비권을 제한하거나 배제하는 방식(노 키즈존, 무인 상점 등)이 허용되기도 하죠.
M사가 현재 국내 매장에 설치된 모든 키오스크를 고객친화적 디자인, 향상된 이용 속도를 위해 개선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고객은 '모두'를 의미했으면 좋겠네요. 모두가 원하는 대로 마음 편히 주문할 권리를 얻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