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is voice Oct 21. 2021

9. 사람 갈아 넣어서 하는 일

-고 홍정운 군을 추모합니다 1)- 

마음이 먹먹해지는 얘기라...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제대로 써야겠다 싶습니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니 1부와 2부로 나눠보겠습니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110141725011

특성화고 3학년 홍정운 군이 전남 여수 요트업체에서 현장실습을 나가 물속에서 일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애초 실습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그것도 안전규정에 따른 2인 1조 진행도 지켜지지 않은 잠수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12kg짜리 납덩이가 달린 허리 벨트를 풀지 못해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일하는 고등학생의 ‘애매함’>

1960년 현장실습제도가 운영된 이래로 학생들의 죽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01914510058745?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아이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끊이지 않는데, 왜 바뀌지 않는 걸까요? 심지어 이 사안은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나이에 따라 목숨의 가치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공식적인 제도 안에서 안전을 담보로 교육이 진행된다는 건 이해하기 참 어려운 일입니다.      


‘현장실습생’의 신분은 학생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저임금 노동자로 취급됩니다. 신분이 학생이니 관리와 책임은 교육부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사고는 기업 현장에서 일어나니 고용노동부의 책임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학습자이자 동시에 근로자로서의 성격이 섞여있다 보니 발생하는 일입니다. 학생이기에 근로계약서, 최저임금 등의 규정이 적용되지 않고, 근로자이기도 하니 교육청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기업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세상을 떠난 홍 군도 그에 해당되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변을 당했습니다.

      

일하는 고등학생은 학력을 서열로 해석하는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 학생이 아닙니다.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와 상관없이 일해야 하는, 일하는 고등학생은 분명히 존재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학생은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관계로 받아들여집니다. ''''學''''생에 대한 고정관념이 확고하고, 노동에 대한 의식을 배울 기회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계속해서 ‘애매한’ 위치입니다. 애매하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손해 보지 않는 대상이라는 의미가 되죠. 부당한 대우를 해도 거부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얘기입니다. 업무 경험이 없는데도 가장 위험한, 가장 기피하는 업무를 맡게 될 수 있고, 심지어 뽑아 쓰고 버리는 ‘티슈노동자’가 될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다음의 내용을 배워보신 적 있나요?  

    

-헌법에 보장된 근로자의 권리 

-노동권 침해 사례와 구제 방법

-노동의 가치와 사회 속 노동자의 역할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학생의 대부분은 노동자가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한 교과서와 교육과정에는 이 내용이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매스컴에서 접한 노동자와 노조 = 파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또한 공교육에 포함된 지식은 그렇지 않은 지식에 비해 사회적으로 신뢰를 받고 영향을 미칩니다. 공교육에 노동교육의 비중이 극히 낮다는 것은 담당자들의 한계만이 아닌, 노동 관련 지식이나 노동 자체를 비주류라 보는 보편적 인식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겠죠.      


특히 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 운영 방식은 기업 중심, 고소득자 중심주의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돈의 흐름도 고소득자에서 저소득자로 이어져 저소득층의 소득도 증가하는 효과를 거둘 거라는 낙수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고소득자의 소득증대로 인한 소비와 투자활동이 저소득자의 소득증대로 이어진다는 논리죠. 이론에 따른 정책이 효과를 보나 싶었지만, 2015년 5월 IMF는 낙수효과 이론에 대해 완전 틀린 내용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세계 150여 개국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상위 20%의 소득이 1% 포인트 늘면 이후 5년의 경제성장률은 0.08% 하락했고, 하위 20%의 소득이 1% 포인트 상승했을 때, 경제성장률은 0.38% 증가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동, 산업, 경제 관련 정책과 언론에서는 여전히 노동자보다는 기업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을 더 우선순위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기업/거대 자본 주도 경제정책, 기업/재벌 프렌들리 정책, 고소득자 소비 부양을 위한 세제 정책, 기업의 자유를 저해하는 규제 혁파 강조 등이 그 예시입니다. 이에 비해 일자리 만들기 예산, 저소득/노인/영유아 복지, 노동자 보호 정책, 최저임금 인상 등은 후순위로 밀리거나 부정적인 기류에서 서술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의 노동은 가치를 산정한 만큼의 임금을 돌려받습니다. 기업가(기업이라는 생산수단을 지닌 노동자)가 (고용된) 노동자보다 더 많은 부를 갖고, 지식 기반 고학력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은 인적자본론, 능력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현상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노동한 만큼’ 임금을 받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 ‘가치있다’ 평가되는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더 높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를 약속받습니다. 가치있다는 평가는 사회에 기여하는 의미, 실제 역할과 상관없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기준,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 기준과 가치는 합당한가요? 생각해볼 겨를 없이 모든 이들이 노동에 내몰리는 사이에 노동은 동일해도 노동자들의 노동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있고, 이러한 판단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인 것처럼 우리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불리한 상황에 대해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내는 게 금수저가 아닌 내 탓이라 자책하면서요. 그러니 우리가 노동에 대한 의식을 확립하고 배울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만큼 서열이 낮다 평가되는 노동과 노동자들의 권리와 안전은 정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노동혐오는 개인의 의식과 경험이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꾸준히 널리 퍼져온 한국 사회의 현실 반영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특정 노동 직군에 대한 고학력 지식 노동자들의 비하 발언이나 

https://www.asiatoday.co.kr/view.php?key=20200116000949405

육체노동 자체를 비하하는 발언들이 흔합니다.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109151740001#c2b

특정 직업'인'을 비난하는 얘기 아닙니다. 정치 얘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진정진정.... 

쓰다 보니 답답해지네요.... 다음 글에서는 그래서 우리는 뭘 해볼 수 있을까, 바뀔 수는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해요. 

이전 08화 8. 민초단 vs. 반민초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