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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is voice Oct 21. 2021

10. 노동혐오가 후진 취급받는 날까지

-고 홍정욱 군을 추모합니다 2)-

<답 없는 고민,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특성화고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해야 하는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즉시 변하기를 바랄 겁니다. 그러나 제도와 인식은 급격하게 변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도입된다 해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반복일 거고요. 이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느껴지는 이들까지도 이 고민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또 다시 ‘일부’의 이야기로 끝나버릴 겁니다.

      

그러니 한가한 얘기, 답답한 소리 같겠지만, 결국 이 논의를 읽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1) 공통의 해석과 정의 찾기

나와 너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계는 우리의 자아 내지 의식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수만큼 존재하기에 홍 군의 죽음에 대한 해석 또한 수도 없이 다양할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객관적 팩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익숙한 방식과 관점으로 의미를 부여한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장실습제도 개선을 위해 교육부가 바라보는, 고용노동부가 해석하는, 노조가 기대하는,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들이 요구하는 내용은 다 다를 겁니다. 각자가 지향하는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하니까요. 그러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솔루션부터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합니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면 사회이슈를 어떻게 해결하냐 싶죠? 여러 집단이 각자 지니고 있는 주관적 해석에 대해 언어와 행동을 사용하여 상호작용하다보면 서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공유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이것을 독일의 철학자 후설이라면 사람들 사이에 상호주관성을 형성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사안에 대한 ’불쌍하다‘, ’분노스럽다‘,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쩔 수 없지‘, 심지어 ’그러니까 공부 좀 하지(믿기지는 않지만...유사한 사건을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입니다...인류애가 바사삭..)‘와 같은 주관적 인식에서 더 나아가 결국 제도와 시설, 환경 정비,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상호주관성입니다. 

’차별과 혐오로부터 인간의 존중과 보호‘는 적어도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과 생각을 초월한 공통의 해석과 정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반복되는 현장실습생의 안전 문제, 노동직군에 대한 혐오 발언과 같은 현상들을 모두 ’인권과 평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해석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합리적이라고 인정, 수용할 수 있습니다.


2) 존재하지만 낯선 이들의 이야기 듣고 배우기 

나는 차별하지 않지만, 사회에는 차별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차별에 동의하지 않지만, 차별받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억울하면 너도 ***에 입사하세요".. 열받지만 많이들 하는 말입니다. 

평등한 사회를 원하지만 다른 이들의 입장을 사유하는 부지런함은 피하고 싶은 게으름이 편합니다. ‘애매한’ 대우를 받는 이들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고, 그 입장을 잘 모른다면 이미 나는 그 상황을 몰라도 되는 권력우위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 놓여있는 이들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구 참여자의 분석을 적극적으로 읽고 그들의 입장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상호작용입니다.     

 

<말이 칼이 될 때>, <아픔이 길이 되려면>, <선량한 차별주의자>,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같은 인권과 차별, 혐오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책들이 많습니다. (읽으라고 홍보라도 하고싶네요..)

<선생님 노동이 뭐예요>, <열 가지 당부>,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 같은 노동교육 책들도 많습니다. 한 신문사에서는 10대들의 노동에 대한 분석 기사를 통해 청소년 노동 현장에 대한 상호주관성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422001005

공교육 현장에서 배우지 못한 주제지만, 교문 밖을 나선 우리들에게 노동과 인권, 차별과 혐오는 더욱 피부로 와 닿는 실제입니다. 배우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게 됩니다.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주제들에 차별과 혐오가 깔려있습니다. 이런 책을 읽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의 가치를 비하하고,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을 혐오하게 하는 ‘상식적’인 목소리로부터 나를 지킬 수도 있습니다.     


3) 목소리 내기 1. 공통의 인식 만들기

노동자의 인권,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 일한 대가를 요구할 권리 등에 대해 비하하고 혐오하는 발언을 볼 때 ‘쓴 소리’를 하는 것은 효과적입니다. 그런 발언을 들은 사람이 아닌, 말한 사람이 눈치 봐야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거죠. ‘너 생각 진짜 희한하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는 식으로 말이죠. 쌔한 표정은 좋은 사이드 메뉴입니다. 

공격하면 방어하려 하겠지만, 후진 걸로 만들어버리면 부끄러워할 겁니다. 즉시 입을 다물게 하고 생각을 바꾸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공론장에서 대놓고 인권을 억압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교화시키는 효과는 거둘 수 있습니다. 

아! 이런 발언을 표현의 자유, 다양성의 존중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더라고요. 하아..... 비하와 혐오 발언은 누군가의 상황을 사회에서 지워버리거나, 누군가의 목소리를 막아버립니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는 인권과 평등이라는 상호주관성, 인간 공통의 가치를 뒤집고 타인의 세계에 폭력을 가하는 행위나 태도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4) 목소리 내기 2. 공통의 인식을 중심으로 연대하기

각종 비하와 혐오 발언을 비난하고 희생자들에게 연대하는 트윗과 좋아요는 중요한 의사표현입니다. 방관과 묵인은 한 사람의 계층에 따라 가치를 다르게 매기려는 차별주의자들이 큰 소리치고 기세등등하게 허용해주거든요. 노동자의 권리를 기업가의 권리와 동일하게 대하려는 기업에 돈쭐을 내고,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불매운동을 하는 방식으로 내가 지지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도 강력한 방법입니다. 

�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차별은 전염됩니다. 누군가가 차별받는 것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내 문제는 아니니까’라고 무관심하게 넘어가면 내가 차별받을 상황을 허락한 것입니다. 동시에 차별하는 인성을 탓하며 이른바 ‘악마화’에 나서는 것은 인권 문제가 사회 구조와 집단 문제가 아닌 개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만듭니다. 그럼 그 개인, 개별 회사만 처벌하면 되는 문제가 되버리니, 갈 길이 또 멀어집니다. 


한쪽의 인권 보장이 다른 쪽 인권을 해치는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노동자의 인권을 강조하는 것이 기업가의 권리신장을 저해하는 것처럼 느끼거나, 장애인들의 인권을 고려하는 정책이 비장애인의 권리를 빼앗는다 분노하기도 하죠. 그러나 인권은 양이 정해진 파이가 아니니, 모든 사람의 인권이 보장받을수록 내 인권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 가치가 다양한 소통방식을 통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함께 공유될 수 있다면 어이없이 누군가와 이별하는 일, 어이없는 비난을 받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홍 군의 죽음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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