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의 여운 속에 만나 예상치 못한 마음을 들키다
부산 김해공항에 어렵게 도착한 때부터 전조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빗줄기는 버스 차창밖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한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버스는 어렵게 진해의 내수면 생태공원에 도착했다.
진해내수면 생태공원. 특별히 이곳에서 봐야 할 무엇이 있다기보다는 중간 기착지 정도로 가벼운 산책이나 하면서 생태공원의 면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마가 내 의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도와주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일회용 우비를 쓰고 해설사에게 생태공원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내심 시간을 때우며 빨리 끝내기를 기대하지만 약속한 시간들이 있고 해설사의 성심 어린 노력을 무위로 끝나게 할 수는 없다.
다행히 비가 그쳐 호숫가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서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생태공원의 시작은 습지가 가진 자연스러운 식물의 분포를 보여주며 특별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습지 위로 마련된 나무데크 위를 걸으며 최소한의 동선만 확보한다.
진해에 이런 생태공원이 있으니 주민들이 산책하거나 가끔 둘러보면 괜찮을 정도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호숫가로 돌렸다. 순간 엄청 커다란 나무가 물가에 자리 잡고 있다. 뿌리가 거의 드러날 정도로 오래된 터주대감 노릇을 하며 호숫가의 첫 만남을 이끌었다. 몇백 년은 된 듯한 이 나무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다행히 쉬어가기 위한 벤치도 마련되어 머물 수밖에 없다. 호수를 바라본다. 해설사에 의하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곳이란다. 과연 보전할 만한 의미가 있겠다 싶다.
호수를 바라볼수록 가슴에 아련한 파장이 감돈다. 때로는 먹먹하고 때로는 아스라함이 차례로 파장을 따라 지난다. 투명인간 취급하듯 이 감정들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투과하며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호수가 발길을 잡는다. 참 묘한 느낌이다. 제주의 바다가 주는 파장과 사뭇 다르다.
이 설렘의 정체가 사실 궁금하기 시작했다. 왜 이리 이 호수에 마음이 동요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시 여기서도 월든 호숫가를 생각해야 하나? 너무 자연생활만 이야기하다 보면 소로우의 월든만 떠오르는 지식의 빈곤함에 다시 한번 놀란다. 그래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간간히 떨어지는 빗방울로 하늘은 찌푸려 있지만 그 때문인지 찰랑이는 물결이 호숫가의 끝자락에 와서 닿는다. 그래 봐야 미동이다. 그 미동의 여운이 강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호수에 대한 감정이다.
나무 테크 사이로 함께 겪을 인생의 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연인을 몰래 바라보고 있는 관음증의 욕망이 돋아난걸까. 그걸 정리하면 미장센이 될 것이다. 다시 시각이 나에게로 돌아간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마음이 호수같이 안정적이면 좋겠다는 기대를 담으며 물길을 응시한다.
호수에 배를 한대 띄워놓고 잔잔히 앉아있고 싶다.
근대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수줍은 청년과 처녀가 배에 앉아 괜히 시구절을 읽었음직한 모습.
막 썸을 타기 시작한 청년과 처녀가 호숫가의 데크에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며 물길을 바라보는 모습.
미국의 청교도들이 채 산업화되지 않은 북쪽의 호수가 어디에서 차분히 하루를 보내는 모습.
여러 가지 모습을 그려봐도 한국적인 정서가 배어있는 그림은 생각나지 않는다.
서구적인 교육의 효과일까. 전통교육의 부재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만 날씨 때문인지 북쪽 지방의 호수를 연상케 하는 결과는 내 마음대로 조정이 되지 않는다.
비가 폭우처럼 내린 덕을 봤다. 아무도 없는 생태공원을 거닐다 보니 잔잔한 호수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바다와 다른 호수. 오랜만에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듯한 물과 잔잔한 파랑을 보면서 차분히 가라앉는 심정으로 늘 흥분되거나 들떠있는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마음의 한 단면이 호수에 투영되고 있다.
명경지수의 느낌을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가끔 얻게 되는 수확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시간 잔잔한 호수의 모습에 동화되어 가듯 내 발걸음도 잔잔하게 걷는다. 사람은 약하지만 자연에 기대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 기댈 수 있는 곳은 그래서 망쳐놓으면 안 된다.
해설사에게 아쉬운 감사의 말을 하고 다음 행선지로 나선다.
아무 생각 없이 방문한 장마시즌의 평일 오후. 색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 되어준 호수에 다시 한번 감사의 눈길을 준다.
문뜩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은 영화와 함께 시구절이 생각난다.
왜 이 물을 바라보는데 윌리엄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이 생각난 걸까.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찬란한 순간보다 일상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삶을 느끼는 것일까.
'초원의 빛이여 빛의 영광이여!'라는 흔히 알려진 이 시의 앞부분보다 맨 마지막 구절을 되새긴다.
"피어나는 하찮은 꽃 한 송이도 내겐 생각을 주나니
눈물이 닿지 못할 심오한 생각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