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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l 25. 2016

한라산 속 숨겨진 원시림_삼형제오름

1100 고지 아래쪽 삼형제오름 너머에서 길을 헤매다

일반적인 제주도 오름을 다니다 보면 늘 불만이 생기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오름이 관리를 위해 가마니를 깔아놓고 다니는 길들을 잘 정비해 두고 있어 길을 잃거나 다른 곳으로 벗어날 여지가 별로 없다.


보존과 안전을 위해서는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그 틀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샘솟는다. 아직은 나 자신에게서 도전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긴다. 순수한 자연의 산행과 같은 느낌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나를 삼형제오름으로 가보라 한다.


삼형제오름을 가는 게 금지되어 있는지 여부는 정확히 모르겠다. 사람들이 종종 다니는 오름 이기도하거니와 주변의 다른 오름들과 함께 깊숙한 한라산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봉우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갑작스럽게 노로오름을 다녀온 후 계속해서 작심을 한 터였다. 바리메오름 쪽으로 해서 임도로 오르는 오름과 달리 다시 내려오는 길을 택하기로 하고 1100 고지를 시작점으로 택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3형제 오름을 다녀오리라 작심한 터였다.

어제의 피곤함 때문에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서인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잠에서 깼다. 뒤척이다 아침 먹고 준비하고 점심 김밥 한 줄 싸고 등등... 여러 가지를 마치고 1100 고지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 게으른 자의 행동치고는 대단히 빠른 시간이다. 주차장에는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가 차가 없다. 이참에 옆에 세워진 고상돈 산악인의 동상을 보며 남들이 알려준 세오름 통신소 길로 접어든다. 


오르는 곳마다 등산로가 아니라는 팻말이 있고 괜히 군부대라는 팻말에 바짝 긴장이 된다. 어디선가 봤는지 옆으로난 소로에 길처럼 생긴 흔적이 있다. 혹시 이곳으로 가는 것인가. 조릿대 길을 접어드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곧 길이 끊기도 그냥 조릿대가 휩싸인 1100 고지 휴게소 뒷면의 어디쯤인 것으로 여겨진다. 삼형제 오름의 정상으로는 맞을 테지만 군부대 관할이라 포기. 다시 원위치. 이미 바지가 아침이슬을 머금은 잎새를 스치면서 물기를 잔뜩 머금었다.


시간을 10여분 소모한 느낌이다. 군부대와 중계소 정문에서 보니 좌측으로 난 길이 보인다. 차들이 다닐법한 충분한 길. 이 길을 따라가면 되지 싶다. 군사시설이 포함된 곳이니 그 앞부분의 사진은 생략했다. 가는 길목의 산수국 꽃이 나의 길을 반겨준다. 여유로운 시작이다. 출발시간도 이르니 천천히 걸어도 될 듯하다. 


삼형제오름은 1100 고지 휴게소 뒤편에 자리한 3개의 오름인 큰오름, 셋오름, 말젯오름을 말한다. 뒤편으로 나란히 있기에 차를 타고 가면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위에서 바라보거나 아래쪽에서 보면 3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구분할 수 있다. 



불행히도 첫 번째인 큰오름은 세 오름 중계소로 인해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100 고지에서 시작하면 오르고 말고도 없이 바로 하산하면서 두 번째인 셋오름으로 향해야 한다. 근데 초반에만 길인 듯싶은 등산로가 금세 조릿대가 점령하면서 길인지 아닌지 전혀 구분이 안된다. 조릿대에 대한 경험이야 어승생악이나 노로오름에서 익히 몸소 체험해 본  바가 있지만 이곳의 조릿대는 차원이 다르다. 기본이 허리를 넘고 심한 경우 가슴까지 올라올 만큼 키가 큰 놈들이 온 산을 덮고 있다. 그냥 봐서는 전혀 길임을 알 수가 없다. 


이를 헤쳐 나가는 방법은 3가지다. 일단은 리본이 달려있는 곳을 찾아본다. 나 이외의 사람들도 다녀간 곳인 만큼 리본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 어찌 됐든 길은 이어진다. 두 번째가 길이 나있는 조릿대는 전체가 새파랗지가 않다. 사람들이 밟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메말라 있는 부분이 이어져 있다. 그 곡선을 따라가면 길인 셈이다. 세 번째는 온전히 발바닥으로 딛고 다니면서 감각적으로 길을 찾아가는 방법이다. 이거야 길인 곳은 위에는 다른 조릿대 잎으로 덮여있지만 아래는 돌과 흙만이 남아있으니 그곳이 길이다.


이 세 가지를 믿고 셋오름을 가기 위해 큰 오름을 내려간다. 그래도 그럭저럭 위의 방법으로 찾아 나선다. 이윽고 두 오름의 갈림길 역할을 하는 개울이 나왔다. 한라산에서 만나는 개울이야 건천이라 메말라 있지만 여기는 많지는 않아도 물이 흐르고 있다. 왜 이리 개울이 반가운지...

이곳도 분명히 내려가는 길이다.

건너편에 걸려있는 리본과 약간의 잎새의 차이, 그리고 바닥을 보고 오름 탐방로를 찾아 나섰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셋오름 오르는 길에 접어든다. 무작정 바로 앞에 보이는 정상을 향하면 되는 것인지라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정상을 밟는다. 올라온 길을 간간히 뒤돌아 보니 여전히 이곳이 길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눈으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을 뿐이다.

이윽고 셋오름 정상이다. 건너편의 통신탑을 보니 이정표가 명확하다. 저곳이 큰 오름이고 내가 선 곳은 두 번째다. 다시 뒤돌아 세 번째로 향하면 될 일이다.


눈 앞에 보이는 나무가 다양한 줄기를 풍성하게 보여준다. 순간 갈길을 멈추고 카메라에 담는다. 마치 나를 보며 이 산에 얼마나 많은 길이 수도 없이 뻗쳐져 있는지 아는가라고 질문을 하고 있는 듯하다. 보는 순간 멋있다는 느낌과 함께 이 산속에서 혼자 교교히 잘 버티고 있네 하는 생각, 간간히 저 녀석에게 무슨 영혼이 실려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심장이 멎은 채 주저앉아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참 별별 생각이 다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이곳을 혼자 찾은 업보이기도 하다. 


사실 한라산뿐 아니라 혼자서 산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무모한 일인가는 익히 아는 바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같은 무모한 도전을 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싶다는 욕망을 누그러뜨리기가 쉽지 않다. 아직 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검증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그럼에도 여전히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산에서의 위험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셋오름에서 말젯오름까지 가는 과정이 이날의 모든 산행에서 어쩌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셋오름의 하산과 말젯오름까지의 길은 사실 비교적 순탄했다. 조릿대가 없이 길이 제대로 되어 있어서라기 보다는 가슴높이까지의 조릿대에 적응도 된 데다 방향이 명확한 관계로 한 번의 망설임이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순간순간 옆으로 난 길들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한다. 앞으로 나있는 길이 불명확한데 옆으로 난 길은 더 선명할 경우 자꾸 옆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늘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은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있는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은 산속에서 헤매는 일 말고는 없다. 공교롭게도 이곳에서는 핸드폰도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보이지 않는 길을 가면서 삐끗해서 다리에 골절상이라도 입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찌 될지도 모르는 길을 계속 갈 것인가.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근거가 없다는 게 문제다. 

말젯오름의 정상표시를 보게 되니 갑자기 목표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공교롭게 말젯오름의 정상에서 4명의 일행을 만났다. 앞장선 이는 나를 보더니 혼자서 왔냐며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다. 이 위험한 곳에 왜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느냐는 표정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하고 대답하고는 일행과 헤어졌다.


조릿대 길은 기본이 허리 이상이기는 해도 리본과 함께 가는 길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하산까지는 어떻게 될 듯싶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삼형제오름을 전부 가봤으니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제부터가 문제다. 사실 딱히 어딘가의 목적지를 정하고 어떻게 원래의 1100 고지로 돌아가겠다는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계속되는 방향에는 한대오름이 오른쪽에는 지난번에 올랐던 노로오름이 있을 뿐이다. 근데 어디로 갈 것인가. 문제는 내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목적지는 삼형제 오름으로 정했을 뿐 다시 되돌아가기에는 눈앞에 펼쳐진 한라산의 숲 속이 나를 부르는 듯싶다. 막연히 노로오름 아래쪽으로 해서 가능하다면 실핀오름을 지나 다시 1100 도로로 나서자는 계획.


가자 조릿대 숲 속으로...


그렇게 이날의 내 첫 산행은 가볍게 마감을 지으려 하고 있었다.

말젯오름에서 바라본 셋오름과 큰오름(중계소가 있는 곳)의 모습.

삼형제 오름의 막내인 말젯오름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은 처음의 급격한 비탈을 제외하고는 한라산 중산간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중간에 나무는 계속 있지만 나무 아래의 식생은 조릿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 산이 전체가 조릿대가 점령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려오다 보니 조릿대 길중에 갈림길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갈 방향도 명확히 생각지도 않은 채 막연히 지난번에 올랐던 노로오름 근처에 가서 탐방로를 따라가다가 1100 도로 쪽으로 다시 빠져나오면 시간이 2시간 정도 더 걸리지 않을까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오늘 하루의 산행은 무난히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삼형제 오름의 두 번째인 셋오름에서 찍은 풍경. 앞부분의 언덕처럼 생긴 오름이 한대오름이다.

내가 저지른 가장 커다란 실수는 오늘 트래킹이 정상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잊은 점이다. 결국 오늘의 산행이 끝마치기 위해서는 마지막에는 오르막에서 끝내야 하는 것이지 내리막이 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무튼 말젯오름에서의 내리막은 계속되고 있었고 일정 시간 내려오자 아무런 이정표를 삼을 만한 것이 전혀 없이 조릿대만 무성하다. 내려가는 길은 어느 정도가 지나자 흔적을 상실하고 만다. 오른쪽으로 가야 맞다는 것을 알겠는데 처음부터 주의 깊게 눈여겨봐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약간 언덕길이었다. 사실 그곳으로 갔더라면 여기에 이토록 장황하게 이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내가 저지른 가장 커다란 실수는 오늘 트래킹이 정상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잊은 점이다

그동안의 산행 습성상 하산길에 대한 선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길이 확연하게 왼쪽으로 나있다. 일단 그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한 중간에 떡하니 부러진 나무가 십자가 모양으로 내 앞길을 막아선다. 부러진 나무를 뒤 감고 있는 넝쿨들이 묘한 심리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 밑을 지나야 길을 계속 갈 수 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밑을 통과해 길을 재촉한다. 길은 원래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 다른 길로 계속된다. 10분이 지났는지 20분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이미 산속에서 방향감각은 상실했고 주변의 이정표가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이 첩첩산중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심리적 동요가 일어난다. 원론적인 나의 판단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 것일까. 지금 가는 길은 남쪽인데 내가 가야 할 방향은 북쪽이 아니던가. 고민을 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섰다. 발걸음을 다시 옮기는데 가까운 곳에서 개가 심하게 짖는다. 이 느낌은 익히 안다. 지난번 노로오름을 오를 때도 바로 옆에서 개가 짖었다. 첩첩산중에서 개가 짖어대는 것은 위험하다. 더구나 누군가 민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고는 사납게 짖어대는 광기의 오싹함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선택은 한 가지다. 뒤돌아 가기로 한다. 저 개 짖는 소리는 지금 상황에서 나에게 더 이상 이길로 가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뒤돌아서 예의 십자가 모양의 나무를 지나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길이 새롭게 보인다. 그래 이 길을 아까는 왜 몰랐던가. 덥석 물고 길을 재촉한다. 이 길은 매우 순조롭다. 


허리 높이 이상의 조릿대도 아니고 길도 잘 보인다. 길을 가는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마땅히 쉴 곳도 없이 피곤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건천도 건너고 다양한 모양의 나무들도 나온다. 이윽고 뜻밖의 예정에도 없는 길이 커다랗게 내 눈앞에 펼쳐진다. 삼나무 숲이 그 사이로 보인다. 한라산 둘레길이라는 표시와 길이 연결된 로프가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조금은 안심이 된다.

첩첩산중에서 개가 짖어대는 것은 위험하다. 민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고는 사납게 짖어대는 광기의 오싹함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그러나 이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이 길을 따라갔으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둘레길 사이로 또다시 탐방로임을 알려준 리본은 나를 유혹한다. 나의 목표는 둘레길이 아니라 노로오름 밑의 탐방로를 지나 살핀 오름 언저리를 넘어 1100 도로로 다시 나가는 것이다.

마치 문어를 연상케 하는 나무
중간에 만난 유일한 쉼터 탐방로 사이에 나무가 넘어져 있어 앉아서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날 하루 가장 긴 시간을 쉴 수 있었다. 점심도 먹고 간식도 먹고

밥을 먹고 쉬는 시간을 마치고는 탐방로를 향해 무작정 걷는다. 걷다 보면 길이 나오겠거니 하면서 무작정 걸을 뿐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토록 사람들 없는 산속을 헤매는 것을 좋아했던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아무런 걱정이 안 된다. 확실한 것은 내가 있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핸드폰도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 장소일 뿐이다. 나는 그저 노로오름과 한대오름의 한 중간 어디 숲 속일 뿐이라고 예상할 뿐이었다.


길을 따라 계속 가니 길은 나를 점점 언덕으로 이끈다. 방향을 남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틀었는데 나를 숲 속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이끌고 있다. 이윽고 산소가 있는 자리가 나오더니 자그마한 정상표시가 있는 곳에서 길이 끝난다. 이 길을 넘어가면 더 이상 내가 가늠할 수 없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다행히 정상에서는 핸드폰의 송수신 막대기가 4개나 올라가 있다. 즉, 인터넷이 된다는 이야기다.  얼른 지도를 열어 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뿔싸! 내가 있는 곳은 한대오름 정상이다. 노로오름이야 대충 알지만 한대오름이라니.. 이곳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곳인데 이렇게 예정에도 없이 와버리고 말았다.


시간을 보니 2시가 넘었다. 마냥 여유를 부릴 시간이 아니다. 트래킹을 시작한 지 5시간이 되어간다. 서서히 몸도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지쳐간다. 어쩔 수 없이 목표를 노로오름으로 두고 그쪽 방향으로만 가기로 해보자.

결과적으로 판단할 경우 단순하지만 당시에는 그 판단이 꼭 옳게 내려지지 않는다

한대오름을 내려와 이미 다녀간 길을 되돌아 가다 보니 넓은 평지가 나온다. 길 건너편 쪽에 나무 사이의 리본이 달려있다. 저기를 지나가면 방향이 북쪽이 될 터이니 그리로 가면 노로오름 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풀밭이라고 생각했던 넓은 평지 위에 물이 차있다. 이곳도 사실상의 습지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한두 발을 디뎌보았더니 신발이 발목까지 빠진다. 이미 아침 이슬때문에 신발과 바지는 모두 젖었고 윗옷은 땀으로 뒤범벅된 상태지만 이 습지를 그냥 걸어서 건너갈 수는 없다. 어찌하면 좋을까. 왔던 길을 계속 되돌아 가보면서 망설인다. 온 길을 되돌아 가야 하는 것인가.  헤매던 순간들이 다 원위치가 되면 이를 어찌하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보면 한라산 둘레길을 만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둘레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판단할 경우 단순하지만 당시에는 그 판단이 꼭 옳게 내려지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다 황당한 판단을 했다. 눈대중으로 가늠해보니 50m 정도 조금 넘거나 100m 정도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풀숲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무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밑은 여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조릿대가 가득했다. 다만 풀밭 가까이는 넝쿨이 엉켜있어 길을 낼 수가 없었다.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서 돌아가니 허리 정도의 조릿대가 이어져 있어 조금씩 헤치며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끝에 건너편 가까이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부터는 가장자리를 걸어서 가면 된다. 이윽고 길이 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 길은 과연 나에게 목적지로의 길을 열어줄 것인가.

길 자체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대오름을 오르는 정상적인 탐방로였던 이유로 길은 찾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북쪽인데 길은 처음에는 북쪽을 향해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점점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다시 걱정이 마음을 앞선다. 꼭대기에서 길을 찾고 풀밭을 건너느라 한참의 시간을 허비했다. 지도를 켜서 내 위치를 확인해 보니 길의 방향은 내 의도보다 더 멀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길은 자꾸 내리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때서야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가장 꼭대기라는 점을 스스로 상기시키고 있었다.

'이길로 가면 안돼!'


문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이곳은 숲 속 한복판이고 내가 갈 방향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이길로 계속 가다가는 골프장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길이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하다. 순간 그동안 이 지역을 다니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 오름의 위치와 임도의 위치를 생각하게 됐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임도를 찾아 나서서 내가 알고 있는 노로오름길을 통해 다시 1100 도로를 향하는 길을 찾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 속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기세 좋게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얼마나 갈지 숲이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는 노릇.

문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이곳은 숲 속 한복판이고 내가 갈 방향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환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얼마나 황당한 상황이 일어나는가. 내가 숲 속에서 고민하며 걱정하던 장소는 임도에서 5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 갈길을 머릿속으로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임도는 내가 아는 임도다. 지난번에 왔던 노로오름 입구까지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다음부터는 이런 어이없는 실수가 없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통신이 두절되기 전에 일단 노로오름에서 1100 고지까지 가는 길이 나와있는 지도를 스크린 캡처를 해놨다. 그래야 통신이 되지 않아도 이미지를 보면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터이다.

원래의 노로오름 입구에서부터 1100 고지를 향한 나의 트래킹은 다시 시작됐다. 지난번에도 노로오름은 객기로 올랐는데 다시 노로오름을 가기로 했다. 오름을 오르지 않아도 될 터이지만 정상에서 주변 길을 보고 싶었다. 지금부터는 실수를 하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다. 조금 늦더라도 차근차근 길을 확인해가면서 가도록 하자는 다짐을 할 뿐이다.


죽을힘을 다해 노로오름을 올랐다. 굳이 예정에도 없는 오름을 2개나 오르고 만났다. 그러나 그 오름 꼭대기에서 사람을 만났다. 말젯오름에서 사람과 잠깐 만나고 한대오름에서 내려오면서 노부부를 만난 후 이날 세 번째 만나는 사람이다.


이번에는 호기 좋게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1100 고지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내 질문에 이 분은 매우 곤혹스러워한다.

"길이 매우 복잡한데요.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왼쪽 길로만 가지 마세요. 그 길로 가면 노로오름 아래쪽으로 가서 아주 멀어집니다."

조금 늦더라도 차근차근 길을 확인해가면서 가도록 하자는 다짐을 할 뿐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지도를 따라 내려왔다. 이 길은 곧 한라산 둘레길과 만났다. 아까 만났던 한라산 둘레길을 걸었더라면 1시간 정도면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참 많이도 둘러왔다. 최소한 3시간 이상은 걸린 셈이다. 다행히 길은 어느 정도 둘레길과 겹쳐져 있었고 중간에 빠져나가 1100 고지로 향하는 탐방로 길을 택해야 했다. 중간에 십자로의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발생했다. 지도가 없었다면 한참을 돌아서 1100 고지를 향해 왔어야 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 이후로는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다.

한라산 둘레길에서 갈라지는 길목

최종적으로 출구가 멀리서 느껴진다. 자동차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자동차 다니는 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인 있었던가. 그 와중에 어디선가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개가 펄쩍펄쩍 뛰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인다. 저 녀석은 또 뭐지? 도대체 나를 향해 오는 것인지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출구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이 내가 무서워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온몸에 힘을 한껏 주고는 개 짖는 소리를 무시하면 출구로 나선다. 출구에는 출입을 삼가라며 안내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나도 이곳으로 다니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곳을 나가는 게 내 목적인지라 그냥 플래카드를 바라만 보면 혼잣말을 한다.

'다음에는 이리로 안 올랍니다'

판단하는 자가 제대로 된 데이터가 없는 데다 판단력마저 부족하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하는지 처절히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시 되묻는다

도로를 걷는데 1100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운전자들이 힐긋힐긋 나를 쳐다본다. 뭣하러 이 뜨거운 여름날 도로를 걷고 있는가에 대한 의아함이 묻어있다.

'니들이 내 마음을 알아? 8시간 동안 한라산 숲 속을 헤매다 온 내 기분을 아냐고?'


갑자기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주말에 뭐해라고 묻는다.

"나 8시간 동안 조난당했다가 지금 나오는 길이야"

아내가 아무것도 안 믿는다. 피식 웃는다. 농담 말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어딘데?"

"차를 향해 걷고 있어. 1100도로야"

뜨거운데 고생하지 말고 빨리 가서 샤워하고 쉬란다. 

나도 쉬고 싶다. 긴 기간 고생했다. 판단하는 자가 제대로 된 데이터가 없는 데다 판단력마저 부족하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하는지 처절히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시 되묻는다.


너 스스로를 진정 믿을 수 있는가?

너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어?

노력할 뿐이다. 제대로 된 자료를 가지고 해야겠다.

빨간색은 이날 내가 헤맸던 길이고 파란색은 원래 계획했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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