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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Aug 05. 2016

한라산의 또 다른 선택_사라오름

산정호수에서 느끼는 침잠의 시간들

한라산은 남한 최고봉이라는 위상으로 인해 등산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다.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이지만 걷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피의 등산로다.


등산로 자체가 참으로 재미없는 길이다. 끝없이 오르는 돌길이 계속되고 설명에만 따르면 통상 왕복 9시간이 걸린다. 사람마다 속도를 내곤 하지만 길이 지루하다는 데는 이론이 없는 듯싶다. 물론 정상에 섰을 때의 감흥이야 다른 부분이지만 말이다.


한라산을 올라보는 대안으로 많이 찾는 산행길이 영실을 통한 웃세오름길과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을 가기 전에 살짝 옆으로 빠져 대폭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사라오름이 있다.

성판악 등산로 입구

아침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자니 파란 하늘이 눈 속으로 쏙 들어온다. 이런 날 집안에서 뒹굴거리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백록담을 오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벌써 오전 9시다. 이래저래 한라산 등반을 하려면 통상 7시에는 올라야 한다. 그래야 오후 늦을 무렵 성판악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한라산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산정호수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다 생각이 멎었다. 대리 한라산 산행으로 사라오름을 찾아보자. 더구나 날씨가 이렇게 맑은데 산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부랴부랴 짐을 싸고 가볍게 과일 몇 개를 담고 후배가 운영하는 김밥집에 들러 김밥 한 줄을 등산가방에 쑤셔 넣고는 시동을 건다.  하늘은 파랗고 작열하는 직사광선은 가만히 있어도 날씨는 온몸을 땀으로 뒤범벅하게 만든다. 숲 속으로 피신하자. 그리고는 산정호수의 맑은 물을 볼 수 있으리라.


제주에서 바다가 아닌 곳에서 물을 보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경이로움을 준다.  비가 와도 모두 땅속으로 스며드는 토양으로 비 올 때만 물이 잠깐 범람하고는 곧 사라져 버린다. 이름하여 건천이 대부분이다. 오름의 산정에도 물이 남아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라산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산정호수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멀리 한라산 자락에 파란 하늘을 덮은 하얀색 뭉게구름이 가득 뭉쳐있다. 그림상으로는 참으로 이쁜 그림이다.

성판악 초입의 등산로 모습

성판악을 향해 가는 5.16 도로는 파란 하늘을 점점 뒤로 보내더니 어느새  찌뿌듯하고 흐린 하늘이 더 짙어만 간다. 그 맑은 파란 하늘은 어디로 가고 온 산을 구름이 뒤덮는단 말인가. 멀리서 본 하얀색 구름 속으로 들어와 보면 구름 속 산책은 생각보다 썩 유쾌하지는 않다. 습한 구름이 습기를 내뿜으며 조금씩 비를 뿌리고 있다. 


'이런... 작은 우산을 두고 왔는데...'

다행히 차에 접이 우산 하나가 남아있다. 비가 적지 않게 내린다. 고민 끝에 우산을 펴고 천천히 성판악을 통과해 걷기 시작한다. 

한라산 산행은 산행 자체로는 매력적이지 않다. 산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산행길이다 보니 신비로움보다는 깔끔하고 제대로 정리된 돌길과 중간중간 깔린 나무데크가 번갈아가면서 이어져 있다. 산에서 보이는 신비감이 거의 없다. 돌이 있거나 나무계단있거나다. 폭이 1m는 족히 넘는 길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분들이 수십 번 이상을 다녀본 길들이라 길 자체는 의미 있는 설명이 되지 못한다

몇몇 관광객들은 샌들이나 구두 같은 가벼운 신발을 신고는 천천히 산을 오른다. 무모한 사람들이다.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라지만 제주의 산을 발바닥이 얇은 신발을 신고 걷는 일은 자살행위다. 어디까지 오르다 포기할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곳은 가보지도 못하고 뒤돌아 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시간 이상을 오르다 보면 사람이 지칠 때가 된다. 그 순간을 아는지 휴게소가 잘 마련돼 있다. 한라산의 등반길은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워낙에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인데다 그 길을 내가 설명한 들 수없이 많은 분들이 수십 번 이상을 다녀본 길들이라 길 자체는 의미 있는 설명이 되지 못한다.

속밭 휴게소를 지난 한참을 오르고 나면 갑자기 왼쪽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선다. 그곳에 사라오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안내판이 있다. 사진이 시원하니 멋지다.


사라오름
명승 제83호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산 2-1번지
사라오름은 한라산 동북사면 성판악 탐방로 근처에 있으며 오름 정상부에 둘레 약 250m의 분화구에 물이 고여 습원을 이루는 산정호수로서 오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음. 분화구 내에는 노루 떼들이 모여 살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거나 호수의 물을 마시면서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오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정상과 다양한 경관이 아름다워 조망 지점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명승지임.
백록담 정상과 사라오름이 갈라지는 곳의 이정표.

안내판을 보며 그러려니 하고 올랐다. 이윽고 나무 사이로 가려진 호수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면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높은 산정에 드넓은 호수가 멋지게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성판악에서부터 찌푸리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수는 제모습을 그대로 멋지게 뽐내고 있었다.

산 정상에 올라 나름 너른 호수를 바라보는 기분은 상쾌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제공한다

기분 좋은 선택이다. 등산길이 그다지 오래 지도 않으면서도 이 같은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살피며 편안한 시간을 갖는다. 


제주에서 산정에 물이 고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토양과 돌이 물을 흡수하는 현무암인데다 이를 땅속으로 흘려보내 바다로 보내는 구조이다 보니 호수에 물이 고이기가 쉽지 않다. 하천이 건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물영아리오름의 오름의 호수를 본 기억 외에는 제대로 된 산정호수를 본 기억이 없다. 물찻오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장오리는 입산금지이므로 가 볼 기회가 없다. 물론 수산리의 인공호수 등은 본 적이 있으나 산 정상에 올라 나름 너른 호수를 바라보는 기분은 상쾌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제공한다.


오르길 잘했다. 호수 주변에 설치해놓은 나무데크는 호숫가를 천천히 걸으며 사라오름의 정상으로 안내한다. 정상이래 봐야 호수 건너편으로 잠깐만 더 오르면 되는 곳이다. 그전에 호수의 느낌을 찬찬히 만끽하며 걷는다. 

사라오름의 정상으로 가는 길
호수에서 한 컷.

나보다 앞서 끊임없이 내가 추월할까 싶어 열심히 걷던 분이 이 호수 앞에서는 나에게 사진 촬영을 정중히 요청한다. 

그야 어려울 일 없는 바. 나 역시 그 대가로 전신사진 한 장을 얻었다. 나름 이런 사진이 나에게는 득템이다.

나무 계단을 마저 오르고 나니 정상이다. 편하게 앉아서 가방에서 점심으로 가지고 온 김밥을 꺼내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편안한 시간이다. 공교롭게도 산정에서 볼 수 있는 한라산은 구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라산의 느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정상의 데크에 앉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가 서서히 변한다. 아래에서부터 구름이 급하게 산정으로 오르기 시작하더니 그나마 조금 보이던 주변의 모습이 서서히 구름 속으로 묻힌다. 구름을 정상으로 몰아세우는 바람이 거세지자 그 사이를 뚫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땀에 절어있는 상태에서 맞는 빗방울은 예상외로 시원하다.


앉아서 쉬는 것도 그만하라는지 빗줄기가 굵어진다.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주변의 사람들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난다. 나 역시 먹던 김밥을 들고는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상에 오래 앉아 조심스레 명상이라도 하려던 내 의도는 여지없이 어긋났다. 한라산의 기후야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이니 이상할 일도 없다. 


다만 아침에 하늘이 파래서 산을 찾기로 한 내 의도와 달리 빗속을 헤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과연 저 아래 시내는 여전히 파란 하늘일까.

빗방울 떨어지는 호수를 한참을 바라본다. 물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수많은 인연을 엮어 나가려나 계속해서 끝없는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뭐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쳐다보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에 먹먹해지는 우수가 어린다. 무슨 이유 때문인 지는 알 수 없다. 물이 주는 촉촉함을 충분히 만끽하며 산정호수를 뒤로 한다. 이제는 하산할 시간이다.

하산길은 결코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나름 속도를 내며 올랐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얼마나 빠르게 내려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급히 내려온 기억만이 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진 이유 때문이다. 숲 속에서 비를 맞으며 머뭇거리고 싶지 않다.


성판악에서도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거세기만 하다. 차를 몰고 시내로 향하자 거리는 어느새 언제 그랬냐 싶게 맑은 하늘을 보여주며 비가 내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침에 멀리서 봤던 흰색 구름 속을 산책하고 온 기분이다. 구름 속에서 걷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사라오름은 이름만큼이나 기대를 하게 된다. 모 시인이 사라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썼듯 사라라는 이름은 아스라한 여운이 남는 여성스러운 느낌의 이름값이 있다. 그 오름의 정상에서 바라본 호수는 여성성을 논하기 전에 물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치유를 먼저 생각게 한다. 더구나 산꼭대기에 있어 힘들게 찾아가도 반겨주는 잔잔함이 있다. 굳이 힘든 걸음을 옮기며 찾아가는 충분한 목적이 생긴 셈이다. 


기분 좋은 오름과 호수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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