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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17. 2016

늦가을 억새의 정취 1_갑마장길과 따라비오름

목적지가 아닌 지나는 길로 찾아간 따라비오름

11월이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점. 더 이상 망설이면 시기를 놓칠 것 같다는 초초함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 갑자기 꽂힌 곳이 따라비오름이다. 제주도 가을 억새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는 아끈다랑쉬와 따라비오름. 아끈다랑쉬는 가을 초입의 정취를 맛 본터여서 다행이다 싶은데 따라비오름의 억새를 지나치기에는 괜히 아쉬움이 크다.


어릴 적 교과서에 실린 갑사 가는 길이 갑자기 오버랩되면서 갑마장길을 택하게 된 날. 오랜만에 다시 맑은 하늘을 보여주고 베스트는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날이다.    


지난해 겨울 서울서 내려온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나선 따라비 오름을 오르는 중 아무 생각 없이 지나게 된 갑마장길이라는 팻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저 길을 가보겠다는 다짐 아닌 생각이 1년간 머릿속에 구겨진 종이조각처럼 숨겨졌다 어느새 확 펴졌다.     


아침에 불쑥 갑마장 길의 안내를 찾아본다. 가시리에 위치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출발이 조랑말 체험공원이라고 적혀있다. 녹산로 한 복판이다. 지난봄 유채꽃과 벚꽃으로 흐드러진 거리의 한 복판이 갑마장길의 출발점이라는 점에 나의 무지를 다시 탓하게 됐다. 물론 그 길은 쫄븐 갑마장길이다. 10km 거리의 짧은 갑마장길이란다. 10km면 족하다.      


녹산로 한복판에 위치한 체험공원은 봄철 유채꽃과 벚꽃을 함께 볼 수 있는 멋진 거리의 한 복판이다. 봄철의 풍경만을 생각했지 가을 억새를 보기 위한 걸음걸이의 출발점인지는 생각지 못했다.

 지난봄 유채꽃과 벚꽃으로 흐드러진 거리의 한 복판이 갑마장길의 출발점이라는 점에 나의 무지를 다시 탓하게 됐다


체험공원의 팻말을 두고 큰길인 녹산로를 건너니 바로 입구다. 긴 갑마장길과 이를 짧게 한 쫄븐갑마장길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한눈에 들어온다. 팻말을 이렇게만 붙여 놓으면 트래킹 하는데 참 편하다. 가시리 마을을 많은 사람들이 찾도록 하는 저력이 느껴진다. 다른 마을들도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가시리의 방문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다.

 

조랑말체험공원에는 바람이 거세지도 않고 갑마장길의 입구임을 표시해 놓고 있다.     


제주의 길들은 이런 점에서 생뚱맞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맘에 드는 구석이 있다. 지난번의 화순곶자왈도 그렇거니와 비치미오름 입구도 마찬가지로 도로변에서 바로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자 갈림길이 나온다. 따라비오름을 먼저 거치는 길인 우측을 선택했다. 지난겨울 방문차 왔을 때 바람으로 날아갈 뻔 한 경험이 새록새록 생각나며 오늘은 얼마만큼의 바람이 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늘 바람이 부는 건지 그날만의 예외인지 궁금해졌다.   

  

곳곳에 처진 철망이 목장 사이로 난 길임을 일러주지만 무엇보다 이 곳이 목장길임을 알게 해 주는 근거는 명확하다


길은 잃으래야 잃을 수 없을 만큼 정리가 잘되어있는 숲길인 지라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그저 앞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이 길은 옆의 가시천과 한참을 동반자로 걷게 된다. 빽빽한 숲 안쪽으로 보이는 가시천 곳곳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보이는 게 낯설다. 천변과 함께 걷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숲 속에서 천과 함께 걷는 경험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가을임에도 빽빽한 나무들은 가시천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약간의 빈틈을 찾아 언뜻언뜻 가시천의 모습을 예측할 뿐이다. 생각보다 깊다. 옆쪽이 아마도 도로변일 테지만 길은 점점 목초지 안으로 길을 이끈다. 곳곳에 처진 철망이 목장 사이로 난 길임을 일러주지만 무엇보다 이 곳이 목장길임을 알게 해 주는 근거는 명확하다. 길 곳곳에 말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순간순간 똥들로 깜짝깜짝 놀란다. 뛰어난 말들이라 똥도 많이 싸는가.     


가을 숲이 주는 느낌은 언제는 이별한 연인을 생각해하는 쓸쓸함이 어느 한편에 있다. 비록 불타는 사랑을 하는 연인이라도 이 길에서는 혹시나 쓸쓸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낙엽의 여운은 발걸음은 물론 온몸을 멜랑꼴리 한 기분에 젖게 한다.     



가시천을 여러 번 넘나드니 눈앞의 오름이 점점 가까워져 간다. 이미 저 오름이 무엇인지 안다. 따라비 오름이다. 제주도에서 억새 철이면 사람이 몰리는 곳이다. 아끈다랑쉬와 함께 따라비오름은 억새가 장관이다. 이미 관광객들도 잘 아는지라 가을철이면 조용하던 오름 주변이 차량으로 북적인다. 사실 내 선자신 그 북적이는 차량을 피하려 갑마장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따라비오름에서야 만나겠지만 그 한복판을 지나면 조용한 길을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주말에 길을 걷지 못한 다음 주는 대부분 힘들고 불행하다. 불행하기보다는 불행을 향한 임계점이 무척 낮아져 있음을 느낀다


길을 걷는 의미를 생각한다. 나는 왜 길을 걸을까. 산티아고처럼 한 달여를 걷는 것도 아니고 주말이 되면 무언가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체력적으로 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내 감정을 솔직히 들여다보는 계기를 주는 가보다. 그래서인지 주말에 길을 걷지 못한 다음 주는 대부분 힘들고 불행하다. 불행하기보다는 불행을 향한 임계점이 무척 낮아져 있음을 느낀다.      


머릿속으로 다양한 길과 내가 선택했던 제주에서의 방문지를 그려본다. 다음에는 더 많은 길을 걸어야겠다. 마을마다 만들어놓은 길들이 더 정겹지 아니한가.     


결국 팻말에 따라비오름이라는 이정표가 바로 나오고 사람들과 조우하기 시작한다. 삼삼오오 걷거나 쉬고 있는 다양한 무리들을 만난다. 이곳이 따라비의 등산로일 터이다. 의외로 나이 드신 분들이 쉬엄쉬엄 오르고 있다. 약간의 속보 걸음을 걷는 나에게 그들은 스스로 걸치적 거리는 장애물로 여기는 것인지 내 걷는 속도를 알아보고는 선선히 길을 비켜준다. 이렇게 되면 숨이 차올라도 중간에 쉴 수가 없다. 앞에서 천천히 가줘야 나도 핑계 삼아 쉴 수 있는데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내 마음을 모른다. 내가 대단한 속보 쟁이인 줄 아는가 보다.      


능선에 올라섰다. 정상을 향한 능선길도 좋고 오름 한 바퀴를 도는 길과 분화구를 가로지르는 길들이 억새 사이에 흔적을 남겼다. 억새를 보기 위한 다양한 사람들이 능선을 걸으며 타인과 경치를 생각하고 있으리라 서로에게 사람이 많은 번거로움을 탓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은 정상이다. 정상에 가는 동안 아쉽게도 억새가 이미 철이 지났음을 알려주는 듯 약간은 빈곤한 느낌이다. 원래 이 정도보다 훨씬 더 많고 멋있을 듯한데 아쉽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냐.


정상에 올라 잠시 쉬고 있는데 동쪽편의 오름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조금조금씩 서쪽으로 온 이유도 있겠지만 이추룩 많은 오름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을뿐더러 식별이 가능한 적이 없었다. 나도 많은 오름을 알고 있다. 기쁘다. 사진에 보인 이름과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을 맞춰보니 거의 알겠다. 가보지 않은 곳도 많지는 않아 괜한 뿌듯함이 가슴속에서 올라온다. 이미 힘을 내서 올라오느라 더위가 온몸을 덮였는데 뿌듯함마저 일어나지 옷을 벗어도 전혀 춥지 않겠다. 실제도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다.     


정상의 나무 휴식터에 앉았다. 옆에 다가와 쉬는 아줌마중 한분이 사과 한쪽을 넘긴다.

“드셔요. 나눠 먹어야지”

사실 가방에서 귤을 꺼내서 먹으려 했지만 귀찮아서 뭉개던 차에 잘됐다. 넙죽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며 받아먹는다. 진짜 새콤하고 맛있다. 이런 호의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혼자 온 중년의 남자라 쓸쓸해 보였나. 그렇게 봐줘도 고마울 따름이다.

“먼저 갑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총총히 길을 재촉한다. 팻말에는 가운데 분화구를 건너는 길이 갑마장길이라고 쓰여있다. 억새가 펄럭이는 와중에 분화구를 가로지르는 느낌은 매우 독특하다. 마치 이곳이 공원인 듯 익숙한 즐거움이 가득이다.     


따라비오름의 분화구는 일정 정도 알이 분화하듯 가운데가  높아 구분되어있다. 분화구 안의 억새가 훨씬 분위기 잡기에 좋다. 분화구 한복판에서 바라보는 능선과 그곳까지 연결된 억새는 먼 남도의 억새를 보기 위해 쉼 없이 달렸던 10여 년 전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남해지역의 천관산이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그때 당시에는 억새가 이쁜 곳을 찾아 자연휴양림을 전전하던 시절이었으니, 참 즐거운 시절이었는데...     


반대편 능선에 올라 정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혹시 나는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이 길을 걸을까. 아무런 생각 없이 무념무상으로 걷기 위한 연습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전히 따라비를 떠나지 못하고 능선 이곳저곳을 서성인다. 아래쪽 벤치에서 쫄븐갑마장 가는 길의 팻말이 보인다.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의외인 것은 내가 가는 길 쪽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저 사람들 모두 갑마장길로 가는 것을 아닐 텐데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단은 무시하면서 나의 길을 가면 그만이다. 오름에서 바라보는 북쪽 방향으로 커다란 오름과 그 길을 연결하는 방풍림이 끝가지 늘어서 있다. 저쪽이 큰사슴이오름일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곳보다 저곳이 더 기대된다. 따라비와 다시 한번 발길을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시점이다. 늦은 가을 기분 좋게 다녀갈 수 있는 오름인 것은 분명하다.

분화구 안에서 바라다본 능선의 모습.


맞은편에 보이는 오름이 오늘의 또 다른 목적지인 큰사슴이오름이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심어져 있는 삼나무 방풍림들이 구획 구분을 해보인다. 저곳이 잣성길이다.

늦은 가을 억새와 함께하는 따라비는 다시 내 발길을 갑마장길로 이어가며 제주의 속살을 좀 더 보여주고자 이끈다. 다시 혼자가 됐다. 분주히 서성이던 사람들이 오름 언저리와 주차장으로 이어질 뿐 다른 곳으로의 이탈은 없다. 혼자 걷는 가을길은 호젓함이 생명이다. 

<계속>

따라비 오름을 내려오며 갑마장길을 향해 걷던중 뒤돌아본 따라비 오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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