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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20. 2016

늦가을 억새의 정취 2_갑마장길과 큰사슴이오름

따라비오름을 내려오면서 뒤편을 자꾸 돌아보다 전면을 응시한다. 방풍림으로 심어놓은 삼나무 숲 사이로 갑마장길이 이어져있다. 숲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한 줄로 늘어선 숲 사이는 새로운 길로 이어져 있다. 숲 사이로 난 길과 옆으로 이어진 잣성이 계속된다. 잣성길이다. 계속되는 초원을 바라보며 숲은 나의 발길을 또 다른 오름으로 인도한다. 큰사슴이오름 혹은 대록산이다.

나름 앙상해 보이는 삼나무 사이로 난 길은 호젓함의 그대로를 보여준다. 기분 좋은 모습이다. 무엇보다 아무도 만날 일이 없다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찌뿌둥한 날씨도 서서히 개이기 시작하더니 따스함마저 느낄 수 있는 날씨가 되어 버렸다.


나무 한쪽에는 돌담이 연이어 쌓인 잣성이 이어지고 맞은편에는 목장으로 사용되는 너른 목초지가 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 한 폭만큼이라고 해야 좋을 넓이의 숲이 계속 이어져 있다. 위에서 바라본 대로 줄로 이어져 있는 숲 안으로 길이 계속된다.


지난번 애월의 잣성을 보면서도 느끼던 거였지만 도대체 이 돌들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었을까. 옛적에 이 성을 줄지어 쌓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결코 일당을 받았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인구도 그다지 많지 않았을 텐데 마을이나 공동체 혹은 관의 필요성에 의해 사람들은 억지로 동원되어 힘든 돌을 들어 올리고 지친 어깨어 부러질 듯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시간을 참고 견뎌왔으리라. 


저 멀리 보이는 초원의 말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무언가의 경계를 위해 이 돌들은 바닥에 놓여있는 것을 단순히 옮겨졌거나 멀리 있는 돌들을 실어 날랐으리라.

걷던 중 잣성길에 대한 설명이 쓰여있다. 

"소재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황: 겹담 구조의 두줄로 된 돌담

상잣성(해발 400~600m), 중 잣성(해발350~400m), 하잣성(해발 150~200m)


간장이라고 불리는 잣성은 하천이 없는 제주지역 중산간 목초지에 경계 구분을 위해 축조된 돌담이다. 조선 후기에 설치된 3개의 산마장(녹산장, 상장, 침장) 중 녹산장과 산장의 경계로서 가시리 마을 공동 목장 내에는 갑마장과 1429년 세종 때 축조된 국영목장인 10 소장의 경계선을 따라 약 6km 정도의 제주도 최대의 간장이 자리하고 있다. 가시리는 축조 당시 원형 대부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 종류의 간장을 모두 보우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설명을 읽으면 이해가 된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읽었는데 다시 기억이 새롭다. 역시 뇌세포가 많이 죽은 탓인지 암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

잣성길을 걷다 보니 삼나무 숲을 빠져나오고 왼편에 놓였던 잣성이 오른편에 위치하도록 길이 바뀌었다.  이제부터는 풍경이 확연히 바뀐다. 왼쪽에 보이는 풍력발전기가 바람에 쉼 없이 돌고 있다. 풍력발전기가 멀리서 보기에는 멋있지만 가까이 있으면 굉장히 괴물스럽고 위압감을 준다. 저음의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도 결코 작지 않게 "휙휙"하며 지속적으로 잠잠한 마음을 깨워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든다. 


에너지 생산이라는 긍정적인 요소 외에 그 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역시 많은 대지를 불모의 땅으로 만드는 일이리라.

잣성길은 호젓한 돌담 사이의 길과 위압적인 풍력발전기 사이를 한없이 걷게 만든다. 멀리 억새풀이 서서히 눈앞에 보이면서 오름과 억새 그리고 풍력발전기의 조화로운 모습이 그림을 연상케 한다. 그림으로서는 일품인 풍경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에너지 생산이라는 긍정적인 요소 외에 그 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역시 많은 대지를 불모의 땅으로 만드는 일이리라

앞쪽에 보이는 비교적 높은 오름이 큰사슴이오름이다. 그 앞에 서니 억새가 나를 반긴다. 이곳의 억새도 따라비 오름 못지않다. 따라비오름만큼 이름을 얻지 못했으나 길이 아주 잘 나있다. 이정표 바로 옆이 유채꽃 플라자다. 봄철의 유채꽃 거리의 한 중심이 되는 이정표가 바로 이곳이구나 싶다. 

큰사슴이오름의 입구는 오르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 점에서는 많이 맘에 안 든다. 차량이 지나도록 시멘트로로 포장 되어있는 게 영 불편하다. 아마 다른 사연이야 있겠지만 오름 오르는 길로서는 젬병이다. 그래도 길은 이곳을 지나 완만한 길을 통해 정상을 향해 이어진다. 아래로 보이는 억새와 목초를 모아놓은 흰색 덩어리가 새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마치 억새 사이에 서있는 묘비와 같은 느낌이다.


사람이 상상하기에 따라 사물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실제로 보면 묘비 같아 보일리야 없겠지만 현장을 기억하면 묘비와 같이 생각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곳은 국궁장으로 활용되는 장소일텐테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공사 중이다. 아마 국궁장을 손보고 있는 것이리라.


시멘트로 이어진 길을 걷다 보니 옆으로 난 계단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오름 오르는 길이다. 완만하게 상당 부분을 올라온 덕인지 정상까지는 그다지 힘들지 않을뿐더러 뒤 돌아볼 때마다 느껴지는 목초지의 시원함이 여유마저 부릴 틈을 준다.


이곳은 따라비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다. 같은 억새를 많이 품고 있지만 탁 트인 전경이 따라비만의 아기자기한 능선길과는 다른 모습니다. 단 하나 정상을 찾을 길이 없다.

분명 오르다 보면 이곳이 정상이겠거니 싶은데 아무런 팻말이 없이 길은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이게 뭐지? 내가 무언가를 놓쳤겠거니 싶어 다시 되돌아와 주변을 살펴본다. 바닥 한복판에 위치를 표시해 놓은 표시가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정상이리라. 그러나 쉴 곳도 멈춰 설 곳도 마땅치 않다. 이런 안타까움이 있었다니. 아쉬움을 달래며 두리번두리번  하산길을 향해 걷는다.

분명 오르다 보면 이곳이 정상이겠거니 싶은데 아무런 팻말이 없이 길은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혹시 놓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연거푸 주변의 풍경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연다. 일단 멋있다고 느껴지는 풍경을 찾아본다. 


뒤편에 보이는 한라산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겨준다. 봉우리 사이에 걸린 구름과 아스라한 백록담 정상의 모습이 신비로움을 동시에 전해준다. 이곳에 한라산을 보는 느낌은 동쪽의 오름들과는 약간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인가 모양새가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래도 별 차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봉우리를 내려가는 아래편에 뿌연 우윳빛 넓은 곳이 걷는이들을 기다린다. 단순히 밭 정도의 넓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억새로 빚어진 장관이 걸음을 자꾸 멈추게 한다.


가시리의 녹산로 주변에는 참으로 멋진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 많은 듯싶다. 격하거나 과하지 않으면서 흐드러진 무언가를 방문자에 제공한다. 봄철의 유채꽃과 벚꽃만으로도 굉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가을의 억새가 이토록 많은 감성적 충동을 자아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따라비의 억새와는 확연히 다르다. 아끈다랑쉬와도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단순히 밭 정도의 넓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억새로 빚어진 장관이 걸음을 자꾸 멈추게 한다

내려가는 내내 그리고 큰 길가를 향해 걷는 내내 흐드러진 억새에 취해 기분이 덩달아 출렁인다. 이 출렁이는 기분을 아는지 살랑이는 바람이 억새를 붙잡지 않고 계속 유혹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허허. 순간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사람이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며 찾은 장소에서 그만한 결과를 얻으면 단단한 기쁨이 찾아오지만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무엇을 만나게 되면 기쁨이 과해 허탈함이 찾아오는 느낌이랄까...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무엇을 만나게 되면 기쁨이 과해 허탈함이 찾아오는 느낌이랄까


억새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걷고 또 걷는다. 그 와중에 다시 풍력발전기가 풍경의 그림값을 더해주려는지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어찌어찌해도 그런 길은 끝이 있는 법 이제는 뻔히 아는 녹산로의 큰 길가로 향하는 넓은 대로가 나타난다. 그 길의 굽이침이 물길처럼 부드럽고 이쁘다. 길의 곡선이 이쁘다는 것은 자세히 느끼지 않으면 알아채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요즘에는 점점 더 길의 구부러진 곡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무슨 징조거나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이제 마지막 행선지까지의 숲길이 남아있다. 맨 처음 출발한 곳으로 향하는 가시천과 함께 걷는 숲길이다. 이 숲길은 머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있다. 머체란 제주도 방언으로 돌무더기를 뜻하는데 곳곳에서 돌무더기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어 머체라는 말을 하는 듯싶다. 그 길은 꽃머체와 목적지에 있는 행기머체라는 아주 생소한 지명으로 남아있다. 솔직히 설명서를 읽어도 이곳들이 왜 그런 명칭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 길은 없으나 지역의 지명을 내가 탓할 일도 아니고 갑마장길의 짧은 걸음은 3시간의 오후 시간을 이용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의 곡선이 이쁘다는 것은 자세히 느끼지 않으면 알아채기 쉽지 않은 모습니다

맨 처음 출발지를 떠날 때는 잘 몰랐지만 그곳을 행기머체라고 한단다. 머체위에 행기물(놋그릇에 담긴 물)이 있었다고 하여 행기머체라는 지명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바위 위에 나무가 자라서 한 무더기의 느낌을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암튼 행기머체를 끝으로 원위치로 오른 10km의 걸음걸이를 멈추게 했다. 예상치도 못한 만만한 길이라고 떠난 오후 산책이지만 뜻밖의 행운을 여러번 만날 수 있는 성과를 얻었다. 이런 즐거운 걸음을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주만 트래킹은 이래저래 기분 좋은 경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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