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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Dec 18. 2016

다시 찾은 제주올레 1코스_말미오름서 바라본 성산

성산에서 초겨울 제주를 보다

올레길 1코스를 가기로한 것은 순전히 즉흥적 결정이었다. 주말에 시간을 오롯이 내는 일이 쉽지 않은 데다 날씨가 받쳐주지 않으면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뭐 그리 바쁘냐거나 주 5일 근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사람 사는 게 늘 자신의 생각 같지만은 않은 게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무튼 날씨가 이리도 좋은데 걷고 싶은 장소와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장기적인 계획으로 생각하고 있는 제주의 길들은 있지만 아직 그곳을 본격적으로 탐방할 계획을 못세웠다. 일단은 가까운 성산을 향해 차를 몰았다. 


<시흥리의 마을 이야기>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제주도는 제주, 정의, 대정 등 3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시흥리가 속한 당시 정의현의 '채수강' 군수가 '맨 처음 마을'이라는 뜻으로 '시흥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주에 부임한 목사가 맨 처음 제주를 둘러볼 때면 시흥리에서 시작해 종달리에서 순찰을 마쳤다고 한다.
시흥리의 설촌은 약 500년 전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두산봉(말미오름)을 중심으로 여러 성씨들이 살다가 해안가 쪽으로 내려와 살았으며 이 마을의 옛 이름은 힘센 사람이 많아 '심돌'마을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찾은 올레길 1코스에는 시흥리 마을의 설촌유래가 가장 먼저 눈에 띤다. 예전에는 별일 아닌 듯 지났던 설명인데 언제부터인지 마을 이야기가 시선을 붙잡는다. 제주에 적응이 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길까.  이전에 는 빨리 올레길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면 이제는 조금은 적게 걸어도 주위를 살펴보면서 자연과 사람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기억하지 못했던 '일출사'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 그 표지석을 억지로 끼워 넣고는 사진에 담는다. 욕심일까.

오르는 도중 만난 겨울채소밭

말미오름은 다른 오름들과 사뭇 다르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어 언뜻 오름이라는 느낌보다는 어는 계곡의 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래서인지 그곳을 향해 걷는 걸음은 계곡을 트레킹 하러 가는 분위기다. 불행히도 주변에 계곡과 물이 없다. 


한 번에 짠 하고 바라보고 싶은 욕심으로 오름 중턱을 넘어 정상 능선에 가까운 순간까지 앞을 향해 걷기만 한다

소돔과 고모라나 올페우스 기분을 내며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계속 바라보면서 느끼는 성산일출봉의 너무나 멋지지만 식상한 듯한 풍광 대신 한 번에 짠 하고 바라보고 싶은 욕심으로 오름 중턱을 넘어 정상 능선에 가까운 순간까지 앞을 향해 걷기만 한다.  여간 힘들지 않다. 역시 인간은 호기심은 온 몸을 초조하게 만든다. 내가 걸어온 뒷길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것을 뒤돌아 반추해야 정상이건만 풍경은 다르리라 기대하면 걷는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지 못하고 달려오기만 한 삶을 반복하는 느낌이다. 


자동차라면 백미러를 통해 바라보면 될 일이지만 인생은 등반과 같이 앞에 놓여진 정상이 궁금하다.언제나 자신이 온 길이 지름길 혹은 제대로 된 길이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혹시 오늘 결정한 내 생각도 내일도 바뀔 테니 무엇이든 초조함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한라산은 참 묘한 풍취를 느끼게 해 주는 곳이다.

말미오름 정상은 능선으로 이어져있다. 한 군데가 불쑥 정상으로 솟는 대신 능선 한가운데가 정상이고 그 주변으로 완만한 능선길을 걷다가 옆의 알오름으로 내려간다. 


사실 이 풍경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날씨 좋은 날 성산봉은 너무 이뻐 슬프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쩌면 이 날씨에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그 쓸쓸함을 담고서도 성산 앞바다는 그윽하고 황홀함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일뿐이다. 아는 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차분히 사방을 둘러본다. 우도가 보이고 지미봉도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나지막한 섭지코지가 언제 올 테냐 싶게 살짝 바다로 튀어나와 유혹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뒤쪽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한라산! 

이곳에서도 그놈의 산 정상은 여전히 구름을 붙잡고는 갈길을 내주고 있지 않다. 하늘이 파랗지 않았다면 역시 비가 내리는 곳이리라. 


파노라마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듯 한 곳에 서서 사방을 뺑둘러본다. 다랑쉬오름과 낮으막한 아끈다랑쉬도 보인다. 예전에 올랐을 때는 이 같은 구분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며 보일 리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바다와 성산일출봉 그리고 멀리 보이는 우도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으리라.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일뿐이다. 아는 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자연과 사람은 참 언발란스하면서도 묘한 엉킴을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 이 곳에 자연만 있어도 좋겠지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아니면 다닥다닥 몰려있는 성산읍내도 정겨움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예전의 순박함 대신 관광의 치열함과 상혼이 상당히 잠식했더라도 농촌마을이 주는 정겨움을 빼았을 수는 없다. 더구나 겨울에 푸르름으로 깔려있는 밭을 보는 신선함을 어찌 거부할 수 있으리오.


짙은 푸르름으로 가득한 바다도 좋지만  아련히 보일 듯 말듯 먼 느낌은 새로운 색다름이다

언젠가 제2공항이 근처에 열리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성산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으려나.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언제고 이날을 기억하며 이야기 하리라. 예전에는 이러했는데 새롭게 바뀌어 쌍전벽해가 됐노라고.


오늘은 밑물 대신 썰물 시간대다. 바다가 푸르름 대신 모래밭의 금색을 살짝살짝 보이니 그 아스라함이 더 큰 울림을 준다. 물이 가득 차고 짙은 푸르름으로 가득한 바다도 좋지만  아련히 보일 듯 말듯 먼 느낌은 새로운 색다름이다. 그래서인가 푸르름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내 가슴을 푸르름으로 물들여야 하나...

세상이 경치만 뜯어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치에 오랫동안 서 있으니 이를 방해하려는가 아니면 때가 되었는가 전화가 울린다. 한참을 쉽지 않은 이야기에 빠져 있는 동안 내 뒤를 따라 오르던 여러 일행이 나를 앞서 저만치 걸어간다. 그 길의 모습이 왠지 내 생활의 한 모습을 보이는 듯 멍하니 한참을 쳐다본다. 나는 전화를 하면서 나의 길을 한동안 멈추어 섰던 기억이 가득하다.

그리고는 한마디.

" 난 어디로 가는지 아니?"

오르는 곳이 있으면 다시 내려가는 길이 있는 법. 그 길목에 묘지가 잔뜩 나타난다. 언젠가 나도 이렇게 이 세상을 떠날터인데 지금 이곳처럼 내가 산 흔적을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시간은 영겁처럼 흐른다지만 역시 영겁이 아닌 것인데 묘지 역시 미련을 남기는 인간의 흔적들일 뿐이다.  그 죽음들에게 나는 무슨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산소가 있는 곳을 지나다 보면 무섭거나 숙연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정겹다 못해 안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흔적을 남겼을꼬. 찰나의 순간을 또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그 역시 찰나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올레길은 제주를 모를 때 걷는 것이 제격이다

갑자기 멋진 풍광의 흥치가 사라지고 길은 아련한 선택의 기로를 지나 다시 오름을 넘고 농촌의 밭길로 이끈다. 그 밭길은 포장이 되어 터덜터덜 걷기에 별로 맞이 안 난다. 뒤쪽의 자동차들이 내가 걷는 게 신경이 쓰이는지 차선을 넘나들며 지나간다. 중앙선을 넘은 차들은 장애물이 지난 후련함을 표시하려 액셀을 밟는다. 나는 내 걸음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저 주택이 붙어있는 동네로 내려오기를 바랄 뿐이다. 


멀리 종달초등학교가 알록달록 색을 과시하며 동심을 자극한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였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난 그 시절의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더 기억을 담기 전에 버스가 올 시간임을 알린다.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걸음보다 회한이 더 짙어진 1코스. 이제 한동안은 이곳을 오지 않으련다.  경치가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첫 방문의 올레길과 너무 다른 나 자신이 낯설어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단순해지는 대신 복잡한 생각만이 맴도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올레길은 제주를 모를 때 걷는 것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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