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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Feb 24. 2017

구좌, 바람이 승리한 날

바람은 생활이다. 그 생활이 낭만과는 다르다. 요 며칠사이의 바람은 제주에서 그곳도 구좌에서 겨울을 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가를 실감케 해준다. 구좌의 바람은 현실이다. 처절하다 못해 압도적이다.     


밭 한가운데 자리한 내 숙소는 바람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는 곳이다. 조금은 누그러뜨릴 구릉이나 건물이 없어 당근밭과 무밭의 푸르름을 벗삼아 바람은 거침이 없다.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다. 시간마저 흐트러뜨릴만한 기세로 몰아치는 덕에 집은 언제나 들썩인다. 누군가 노크하듯 창과 문이 요동친다.     


얼굴에 닿는 감촉이 곧 그날의 날씨다. 춥거나 따스하거나 아니면 잔잔하거나 하루를 맞이하는 자세는 문을 여는 순간 바뀐다. 언제부턴가 그런 바람속에서 사는 내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될 때가 많다. 자발적 고립이다.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고립인지는 규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스스로 고립감을 갖고 그것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바람을 삼으려 할 뿐이다.     


오전 내내 바람을 핑계삼아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는 호사를 누리다 허리가 아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를 가야 한다. 궂은 날씨는 아니지만 집안에서만 하루를 보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럴 때 가장 만만한 곳이 바다다. 제주가 주는 최고의 강점이 대충 나가면 눈을 호강시키면서 하루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세화바다로 향한다. 열어 제낀 문에 바람의 저항이 생각보다 덜 거세다. 이정도면 견딜만하다.      


숙소에서 세화해변까지는 걸어서 20분. 차를 몰고 가면 5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주말에 끌고 나온 전기차를 충전한다는 명분으로 해녀박물관까지 달려간다. 충전시간은 20여분. 아직 100여km를 달릴 에너지가 남았으니 20분이면 족하다. 20여분간 세화바다를 거니는 여유를 느껴보리라.     


차 밖으로 나서는 순간, 바다보다 후회가 먼저 와 닿는다. 왠 바람이 이리 거센가. 바람이 거세다는 것은 머리속으로 상상하는 일과 다르다. 집에서 나설때는 이토록 거세지 않았는데 바다에서 직접 맞닥뜨리는 바람은 예상보다 훨씬 세다. 더구나 추위를 감싸안은 바람은 살을 에인다는 말이 멀지 않다. 추운것과 추운 바람은 그 영향력이 사뭇 다르다. 점프라도 할라치면 저만치 나뒹굴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음을 알고 살짝 뛰어보지만 몸은 제자리다. 어리석다. 설마 바람에 내 몸이 날아가리라고 생각하고 진짜 뛰어볼 줄이야. 내 자신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놀란다.     


구좌바람은 비현실적인 가능성을 시험하게 해준다. 비현실적인 추위를 몸으로 맞게 하고 단1분의 시간이 얼마나 영겁과 흡사한지 마음을 간사하게 한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겨울바다의 낭만은 이런 날씨라면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주위에 사진을 찍고자 나왔던 몇몇 커플이 추위를 피해 도망치듯 차로 달려든다. 세이프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무모했음을 아는지 곧바로 차를 돌려 주차장을 떠난다. 그들은 따스한 온풍에 음악을 들으며 거센 파도에 일렁이는 흰색 거품을 감상하며 해안도로를 질주할 것이다.  

   

어쩌면 구좌의 겨울바람은 자동차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바닷가에 서있는 주택들이 야위어 보이는 이유는 그 바람을 온 몸으로 버티는 나와 같은 신세라는 동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바람과 함께 하는 사이 구좌는 다시 바람의 왕국으로 제 위치를 찾았다.      


그래서인가 유리창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나는 채 끝나지 않은, 아니 충전을 막 시작한 자동차의 충전을 중단하고는 유유히 차를 돌렸다. 오늘은 구좌의 바람이 승리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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