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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Feb 15. 2017

눈 내린 한라산

겨울왕국 속으로 나선 돈키호테의 추억

며칠째 겨울 한파가 온 제주를 휩쓸었다. 육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제주의 겨울에 변변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올해의 생을 마칠 것이리라는 온갖 추측을 무색케하면서 겨울은 흔치 않은 생채기를 남기며 힘을 과시했다. 며칠 동안이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흔히 겨울을 마녀로 비유하는 유럽식 동화처럼 그 위력을 얕잡아본 모든 이들에게는 충분한 바람과 눈보라의 힘을 과시했다. 결코 우습게 보지 말 것을 경고했다.

기사로서 모험을 떠나 겨울왕국의 실체와 맞닥뜨릴 시간이다

그 경고를 충분히 받으며 실내에 숨어있는 사이, 겨울 마녀의 퇴각 나팔이 들려왔다. 이제는 반격의 시간. 겨울왕국을 찾아 마녀의 공격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굳건히 잘 견뎌왔음을 알릴 시간이 됐다. 기사로서 모험을 떠나 겨울왕국의 실체와 맞닥뜨릴 시간이다. 어쩌면 많은 시련이 있을 테지만 마음만은 청춘인 돈키호테로 분장하고는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는 왕국의 본영을 찾아 나섰다. 마법은 지금부터 효력이 있다.


겨울왕국은 사람들을 홀리는 재주가 뛰어나다. 때때로 수많을 흔적을 남겨놓았기에 그녀의 왕국을 찾아 나서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길가에 남겨진 흔적은 중심으로 갈수록 흔적 대신 왕국의 영역 표시와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추위에 강한 적대감을 품고 겨울왕국을 향해 나선 비장함이 성판악을 넘으니 현실과 맞닥뜨렸다. 모든 길이 엉켜있다. 도로 가득한 인간들이 눈앞의 설경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겨울 마녀는 영실을 통한 왕국으로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전설의 영웅 역시 얼음왕국으로 모험을 떠날지라도 아침 일찍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입산통제라는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모험은 이대로 끝이 나는 듯하다.


중간계인 1100 고지 역시 온갖 인간의 이기심으로 모든 차량을 엉키게 만들어 놓았다. 겨울 마녀는 곳곳에 다양한 장애물을 깔아놓으며 인간들의 이기심을 자극한다.  여기라도 머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방안에서 빈둥대다 모험을 찾아 나선 돈키호테에게 유혹의 선물을 준다. 한때 인간세상이었으나 겨울왕국이 되었음을 선포하며 다른 세상임을 알려준다. 곳곳이 절경이다. 사람은 상상치 못한 순간을 맞이하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인위적 학습의 결과가 아니어도 그 탄성은 흥분으로 바뀌는데 아무런 배움도 필요 없다. 본성만 살아있으면 된다. 점점 이성을 잃어 간다. 나는 이곳에 무엇하러 왔는가. 모험을 떠난 기사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서서히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간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 왕국에 왔는가. 혹시  얼음공주라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기사는 이날 모험의 목표를 잊었다.

 모험을 떠난 기사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서서히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간다

제주는 계절별로 전혀 예상치 못한 딴 세상을 보내준다. 그 몇 번 안 되는 기회. 겨울에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제주에서 겨울은 한라산의 계절이다.

어리목으로 오르는 눈 터널은 겨울왕국으로 빠져드는 길목이다. 도로는 말끔하지만 나뭇가지에 얹힌 눈은 강렬한 명암을 선사하며 여기서부터가 진짜 겨울왕국의 영토임을 확실히 일깨워준다. 나는 그렇게 겨울왕국에 들어왔다. 그 길을 지나면서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겨울왕국에 싸우러 온 줄 알았는데 특사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들고 날카롭고 사나 울 줄 알았던 왕국은 환희와 축제의 장으로 갑자기 폭죽을 쏘며 방문자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무서운 세상이 기다릴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오로지 나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이곳은 겨울이 마녀의 공간이 아니라 공주의 보금자리였음을 알게 해준다.

비롯 이곳에서도 한라산 등반을 통제당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최소한의 옵션이 존재한다. 어승생악은 중심에 오르는 것과 달리 중심을 볼 수 있는 전망대의 역할을 한다.


등반 통제에 좌절한 많은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발길을 어승생으로 돌렸다. 이곳 역시 가득 찬 눈의 향연에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다. 공간의 70% 이상이 눈으로 덮여있는 모습을 보는 기회가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오르는 내내 탄성을 자아내며 사람의 심성이 미리 눈 녹듯 녹아내림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들을 알지 못해 경계심을 갖는 일이 우선이 아님을 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다정함을 가질 수 있는 시작이다. 방향을 어디로 삼느냐가 많은 결과의 변화를 이끈다.

오르는 내내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수많은 눈송이와 그들이 만들어낸 순백색의 세상에 감사함을 느끼며 걷는다. 영화 러브스토리를 찍어도 좋을 푹신함의 순수함이 산 중턱 곳곳에 널려있다. 평상시 무심히 지나던 나뭇가지들이 다 자신들을 뽐내고 있다. 이 모든 인사를 어찌 다 받을 수 있으려나.

공간의 70% 이상이 눈으로 덮여있는 모습을 보는 기회가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한라산은 계절에 따라  색의 변화가 다양하지만 겨울산은 한여름의 조릿대가 보여주는 산속의 풀밭 같은 느낌보다 더 강하다. 곳곳이 터널이고 곳곳이 보금자리다. 하늘을 벗 삼아 집을 지은 느낌이다.

나뭇가지 끝자락에 맺힌 상고대가 폐에 퍼져가는 순간. 아무 데나 들이대는 카메라가 들이는 풍경은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진을 보는 순간조차 혹시라도 이 눈이 녹아내릴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은 물론 머릿속까지 새하얘지는 순간을 담으며 덤덤히 걷는다. 신발에 끼워둔 아이젠만이 얇고 날카로움 모양의 자국을 눈 위에 만들 뿐이다. 아이젠이 없이 내려온다는 생각을 해보니 차라리 미끄러지며 누워서 내려오는 것이 쉬울 일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조차 혹시라도 이 눈이 녹아내릴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십수 년 전 한 겨울 아이들 데리고 태백산 정상 엘 갔던 기억이 난다. 내려오는 길 어디선가 찾아낸 비료포대를 타고 아이와 같이 간 한 살 위 형은 태백산을 사실상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도 있나 보다.

어느덧 어승생의 정상이다. 뒤편에 장엄하게 펼쳐진 한라산의 능선이 눈으로 가득 차고 그 위에 피어난 상고대가 산호처럼 퍼져있는 모습을 보며 역으로 이곳이 남태평양의 어느 바닷속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상상도 해본다.


이런 풍경을 보고 겨울 마녀로 지칭대는 왕국을 논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영성이 가득 찬 느낌이다. 축제는 내가 펄쩍 뛰어오르며 논다고 될 일이 아니고 온 세상이 축제 그 자체임을 느낀다.


멀리 윗세오름이 보이며 y계곡과 왕관릉의 모습이 명암이 가득하게 보인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이곳에 눈이 쌓여도 이 같은 절경을 만들어 주니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다. 서남쪽을 바라보며 숲 전체가 눈꽃으로 뒤덮인 모습 역시 어찌 간과할 수 있으리오. 기사는 어이없게도 이쯤 되면 특사의 명분도 더 군다가 마녀를 잡겠다고 정신 나간채 나선 길 역시 아무런 미련이 없다. 단지 한마디 고맙다는 말밖에...

내려오는 하산길. 잠깐 돌아본 정상 사이로 구름이 살짝 거치며 백록담을 보여준다. 마치 터줏대감처럼 정상에 앉아있던 초로의 등반객은 자신이 앉아있던 1시간 반 동안 처음 보이는 백록담이라며 얼른 사진을 찍으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역시 주인공은 신비로워야 제멋이다.

스스로 작심하고 이런 눈벼락을 맞을 만큼 나는 동심에 있지 않은데 아이 덕에 겨울왕국의 마지막 환영 세리머니를 받았다

하산길은 사실 저절로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내려오는 속도를 따라가느라 발걸음이 더 바빠진다. 그 사이 촬영에 여념이 없는 커플이 서성이며 내게 카메라를 내민다. Could you take us a photo? 발음은 분명 중국 발음인데 영어인 것은 확실하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쪽의 커플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에게는 더도 없는 행운인 셈이다. 어찌 이런 풍경을 볼 기회가 그들 생에 더 있을 것인가.


마지막 도착점이 남은 지점 내가 지나는 길에 맞추어 어린 녀석 하나가 눈 쌓인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어 댄다. 가지에 쌓여있던 모든 눈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갑작스러운 눈벼락 공격을 맞았다. 화들짝 놀란 그들 부모가 나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이야기하라고 재촉한다. 녀석은 마지못해 미안한 말을 한다. 그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사이 내가 그 안으로 끼어든 셈이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스스로 작심하고 이런 눈벼락을 맞을 만큼 나는 동심에 있지 않은데 아이 덕에 겨울왕국의 마지막 환영 세리머니를 받았다.


뒹글 거리는 오전 시간이 이미 한참을 지나 저녁이 더 가까웠지만 순백의 겨울왕국에 내가 속해있다는 경험은 아마도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그 설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제주에 사는 이유를 또 하나 추가하게 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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