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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l 21. 2017

둔지오름은 평지보다 살짝 높지 않다

숨차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쉬지 않고 오르길 바라는 마음

둔지오름에 갈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송당을 지나 평대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친구가 이야기한 둔지오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한동리와 덕천리 가는 길목 어딘가에 둔지오름이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고 지나다니면 평지에 뻘쭘하니 솟아있는 오름이 눈에 가끔 들어올 때마다 "저긴 뭐지?" 싶었다.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차를 몰고 가는 중간 갑자기 길목에 둔지오름이라는 바위에 새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왕복 2차선이기는 하지만 차를 세울 만한 장소가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렵게 어렵게 주차를 하고 오름 입구에 섰다. 

둔지오름
표고 282m이고 비고는 152m다. 둔지는 평지보다 조금 높은 곳을 이르는 제주 방언으로 '둔지'가 많은 지형이라는 데서  '둔지오름'이라 했다.
오름 북쪽 비탈에는 조림한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고, 남쪽 비탈은 풀밭으로 듬성듬성 해송이 자란다. 남서쪽으로 벌어진 말발굽형  화구를 가지고 있는데 원 지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화구 앞쪽에는 용암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작은 구릉들이 많이 있다. 오름 주변에는 돌담이 둘린 무덤과 그렇지 않은 무덤들이 많은데 지형에 따라 돌담의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유택 도시(유택 도시)'라는  인상을 풍긴다. 

평지보다 조금 높은 곳이 둔지라 했다. 둔지오름이라는 이름이 낯설다. 평지보다 조금 높지 않다. 주변이 평지인 것은 그냥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오름이 어딜 봐서 평지보다 조금 높단 말인가. 평지에 생뚱맞은 봉우리 하나 불쑥 올라선 것인데...


물론 이름을 이 봉우리 하나만으로 그렇게 짓지는 않았겠으나 차를 몰고 봉우리 부근에 다가서면 설 수록 굉장히 가파른 봉우리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오름 입구에 서서 둔지오름의 의미를 읽는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구좌사람들, 아니 한동 사람들은 이곳 어디를 봐서 둔지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을 했느냐 말이다.


이름에 대한 불신을 가득 품고는 그래서 많이 높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적절한 계단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초입부터 옆에서 보이는 산담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좋은 터에 산담을 두르고 멋진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무엇하리오. 아무도 찾지 않고 풀만 무성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을... 후손들의 노력이 야속함으로 변할 일일 뿐이다.


오르는 내내 후회가 앞선다. 하루 종일 다른 곳을 다녀온 터라 몸이 무겁다. 동검은이, 손지봉을 다녀오고 집에 가기 전에 들른 곳이라 낮거나 아담했으면 좋았겠지만 둔지오름은 나의 마지막 인내심을 짜내고 있었다. 길이 곧바르고 바트다. 


마지막 남은 물도 차에 남겨두고는 뙤약볕을 내리 받으며 오른다. 그래도 어렵게 어렵게 오른 정상은 언제나처럼 적절할 보상이 뒤따른다. 한동리의 너른 밭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앞에 바다가 너른 느낌을 이어받았다.

시원하다.

뒤를 돌아보니 송당 쪽의 다양한 오름들과 너무나 잘 알려진 오름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있다. 경쟁이라도 하려나...

느닷없이 방향을 바꿔 오른 오름은 느닷없는 경치를 선물로 준다.

바다쪽가 한라산 쪽 방향의 풍광이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이 오름에 오른 이유는 평대 한 복판의 친구 비닐하우스를 멀리서 보기 위해서다. 주변에 돈사가 있다는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사소한 실무적인 필요에 의해 올랐지만 사소함은 그만큼 잊기 쉽다. 내 등반 이유를 잊었다.


대신 한동리에 대한 그리움을 대가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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