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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30. 2017

제주시로 들어오는 길

2014년 11월 1일_ 올레 17코스 예상 밖의 환영

금요일 저녁은 토요일에게 미안한 날이다. 토요일에 살아야 할 시간을 금요일 저녁에 써버리는 경향이 있다.


10월의 마지막 밤인 31일이 공교롭게도 금요일인지라 불금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보다 29일 서울에 올라가서 하루를 온전히 지내다 다음날인 31일 오전에 내려와 보니 제주가 옆동네 같다는 생각이 든다. 9시 출근을 위해 서울에서 7시 25분 비행기를 탔다. 별로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다. 비행기는 시간을 단축시켜주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상황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리둥절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깜빡하고 졸다보면 다른 세상에 와있으니 말이다. KTX를 타거나 하면 움직이는 거리를 느끼는 동안 몸이 그 변화를 감지하여 모든 전환을 준비하는데 비행기는 그 전환에 적응하는 것보다 거리의 이동을 빨리 해주는 것 같다.

거기에 금요일 저녁 바쁜 저녁시간을 보내다 보니 방에 도착해서 아차 싶었다. 내일 아무리 일찍 일어나려 해도 오전 시간은 다 버리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일어나 보니 11시다. 어찌할까 싶어 고민하던 중 제주시로 돌아오는 17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이 코스면 끝나는 것도 제주시니 돌아오는 길도 멀지 않고 좋을 것 같았다.


광령리 시작점을 찾아 나선다. 버스에서도 멀지 않은 거리다. 사실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코스를 완주한다는 의무감 아닌 의무감 때문이지 가는 만큼 가보자는 시작의 의도. 그 시작점조차도 아무런 특색이 없는 동사무소 앞이다. 그냥 인도를 따라 걷는다. 무수천 길을 따라 내려가란다. 여전히 아스팔트 길이다. 다행인 것은 그곳이 천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한적해지기 시작했으며 시골 밭이 바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천변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다양한 형태의 집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곳도 애월의 한 부분일 테니 집들이 한 적하고 멋스러운 곳이 많다. 참 부러운 부분이다. 나는 왜 이곳을 걷고 있는지 다시 한번 자책하는 마음이 든다. 마음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갈피를 잡기 힘든 심정이다. 그나마 도심에서 빠져나온 지 몇 분 되지 않아도 이처럼 호젓하고 한적한 마을이 남아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자 제주의 힘이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며 걷는데 길이 점점 더 맘에 든다. 비록 흙길은 아니지만 충분히 걸을만한 구간을 제공해 준다. 나를 이렇게 반기고 있다는 생각에 의미 없는 벤치와 꽃밭도 카메라에 담는다. 사람이란 참 단순하다. 개천을 따라 길을 낸 이유가 있다 싶다. 이윽고 아래쪽으로 바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 바다를 향해 걷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걷다 개천의 바위를 보다 묘한 생각이 든다. 바위들이 둥글 둘 글 깎여 있기는 하지만 마치 골렘이 숨어있는 모습이다. 바위 괴물인 골렘이 쉬고 있다가 다른 자극으로 바위로 이루어진 팔다리와 몸통을 하고는 불쑥 내 앞에 나타나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 경험치를 공유할만한 내 나이 때의 인간들은 없겠지만... 아이들 게임에서나 나옴직한 느낌이다. 길은 바다로 나를 곧바로 인도하지 않는다. 바로 코 앞이 바다일 것 같은 데 길은 계속해서 나를 다른 쪽으로 인도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올레길 그린 사람이 길을 이곳으로 보냈는가 싶어 다다른 마을을 보니 외도동이다. 아, 여기가 지도에서만 보던 외도동이네... 덩그러니 택지 개발을 통해 네모난 모양으로 개발해놓은 느낌이 들더니 실제로 와보니 외곽의 일부 지역을 빼놓고는 직사각형의 개발지인게 확연히 드러난다.

약간의 아파트 옆길과 동네 운동장을 거치더니 갑자기 예상외의 경치를 턱 하니 선물한다.

여기는 어디지... 월대란다. 천연 풀장이 형성되기 너무도 좋게 생긴 곳이다. 이렇게 아담하게 이쁜 동네가 있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갑자기 이 동네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도 맑고 저 앞은 바다고 그 바다로 나가는 개천은 너무나 수려하고 아담한 경관을 자랑하는 게 유럽의 어느 소도시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갑자기 길을 벗어났다. 올레길이 아닌 이 동네를 둘러보고 싶었다. 동네라봐야 아파트와 빌라촌들이 전부 다이다. 벽화거리라고 그려놓은 벽화라는 게 조악하기 그지없다. 다른 동네를 따라 하다 보니 이 수준에 머물러 있구나... 괜스레 이곳이 아니더라도 제주도에서 마을운동을 하면 참으로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원래의 코스로 돌아오려 큰길을 따라 걷는다. 문뜩 초등학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초등학교 맞아... 시설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싶다. 내 아들놈이 초등학생이었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게 해주고 싶다. 왜 이런 곳을 몰랐을까. 제주도 전역의 초등학교 시설은 어디를 가나 최상이다. 서울과 경기의 각팍한 모습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입시위주의 교육이 뼛속까지 스며들면서 아이들에게 학원과 공부만을 강요하는 그 치열한 한심함 속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동네를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어 졌다. 이 학교가 아니라 제주의 대부분 초등학교 시설은 이와 유사하다. 교육의 질도 나쁘지 않다 하니 권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윽고 바다로 나왔다. 이곳부터는 바닷길이다. 계속되는 제주시의 바닷길을 천천히 보기로 하고 걷는다.  할머니 두 분이 바닷가에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부니 한분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바람을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정겨운 모습니다.


이 바다의 해변은 둥그러운 자갈들로 이루어졌다는 게 특이점이다. 알작지라 했던가. 제주에서는 이런 자갈 해변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리라. 거친 현무암이거나 가끔가다 모래 해변인데 비해 이곳은 남해안 해변에서 가끔 만나보는 자갈해변이었다. 본격적으로 낚시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보인다. 자갈로 이루어진 바닷가를 지나니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있다. 사실 안내서에서 보리밭이라 하니 내가 보리밭인 줄 알지 그냥 봐서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알턱이 없다. 

보리밭을 지난 길은 널따란 밭과 더불어 다시 호젓한 해변을 내보인다. 유명한 이호태우 해변이다. 제주시내에서는 가장 유명한 해변이니 가봐야지. 지난번 아내만 혼자 쓸쓸히 보내기만 한 아쉬움이 남아있는 곳이라 나도 괜히 이곳을 혼자 간다는 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언제쯤 이 궁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이호태우해변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감동은 없다. 다만 해가 뉘웃뉘웃거리는 때인지라 밝은 느낌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도 오랜만에 모래 해변을 보니 반갑다. 화순 금모래해변만은 못하지만 제주시 바로 옆에 이 정도의 해변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직도 바다에서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다. 가까이 가봐야겠다. 몇몇 아담한 카페들이 눈에 늘어오지만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실만큼 청승에 익숙지 않다. 다음에 시간을 가지고 해보고 싶지만 혼자 마시는 커피는 어쩐지 별로다. 원래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거기 앉아있으나 아무 데나 걸터앉으나 별 차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서핑을 하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호주를 생각나게도 하고 따뜻한 시간이 아님에도 저러는 걸 보니 젊은이들이거나 마니아들의 생활이 부럽기 그지없다. 즐거운 인생들이다. 그들의 실제 삶은 모르겠으나 자신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모습은 결코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은 생활의 태도라 할 것이다. 이호태우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서핑과 저 트로이 목마와 같은 기념물이다. 무언지 가보고 싶지만 그럴만한 힘이 없다. 그래 봐야 보이는 것은 바다가 전부 아닌가. 여기의 바다나 저기의 바다는 마찬가지다. 암튼 다음에 편안 시간에 아내와 같이 오고 싶어 졌다.


해가 질듯하다 갈길이 멀다. 재촉해야겠다. 이제는 바닷길로 항구를 몇 개지나 용두암까지 가보련다. 해안의 바닷가 길이 전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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