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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31. 2017

산책 한라수목원

주말의 여유_2014년 11월 16일

일요일이다. 토요일을 충분히 걷지 못한 자책감으로 오늘은 어딘가를 가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터에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요일 오전 30분을 통화했다. 잠이 다 깼다. 12시가 넘어섰다.  깨기 싫은 시간이다.


고민 끝에 아주 가까운  한라수목원을 목적지로 잡았다. 내가 사는 숙소에서 행길 하나만 건너면 한라수목원까지 연결된 산책로를 갈 수 있다. 도로가 아닌 숲 속의 길. 그곳을 통해 한라수목원을 가보기로 했다. 주유소를 지나고 어린이집을 옆으로 돌아 가정집 아저씨가 열심히 세차하는 앞을 천천히 지나면서 산책로에 다다르는 나무계단을 올랐다.

 여기서부터가 편안함의 안내자이다. 집에서 걸어 5분도 안 되는 장소에 이같이 고요하고 아늑한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를 이제야 걸을 수 있다니...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곳은 곁에 두고도 늘 내팽개치고 무시하다가 나중에야 후회하고 찾게 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중요함을 뻔히 알면서도 나중에 현실이 어려워지거나 아쉬운 이별의 순간에 그 소중함을 더욱 뼈저리게 깨닫기 마련이다. 아무렴 그 무엇보다 내 가족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오늘은 속도를 내지 않고 주위를 음미하면서 걷기로 했다. 버스를 탈 이유도 집에 돌아갈 때의 어려움도 없을 테니 그다지 서두를 이유가 없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연결한다. 요즘 자주 듣는 radio tunes 앱의 클래식 채널을 누른다. 예의 미국 해설가가 편안한 목소리로 작가들을 소개해 준다. 오늘은 genkins도 나온다. 이 채널은 한국의 클래식 음악들이 너무나 뻔한 작가들과 음악울 틀어주는데 비해 한국 채널에서는 잘 듣기 힘든 고전음악의 장르나 현재의 클래식들을 아주 잘 소개해 주는 매력이 있다.


너무 잘 어울리는 음악들이 숲과 함께 귀와 몸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 기분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면 이 상쾌하면서도 포근한 가을의 숲 속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만끽한다. 갑자기 집에 가서 뭔가를 긁적이고 싶다는 욕망이 솟는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연이어 미국의 대표적 영화음악을 틀어준다. 러브스토리도 나오고 닥터지바고도 나오고 하물며 스타워즈도 나온다.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알지 못하는 바이올린도 나온다. 잔잔한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순간... 가슴이 다시 한번 달아오른다. 집에 책상을 마련해야겠다. 최소한 중고 책상이라도 어디서든 들여놔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더 이상 뭉개면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연못을 발견했다. 앞으로 산책길에 이 연못에서 자주 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을의 정원과 시집 한 권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한동안 자리에 앉아 관광객들의 사진 찍는 소리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마치 내가 오랫동안 이 장소를 내 장소로 찜해둔 듯 그들을 낯선 이방인으로 맞는다. 역시 사람은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오만해지는 걸까... 웃음이 나온다.


푹신한 오르막을 천천히 걸으며 정상을 향했다. 한라수목원의 정상은 광이오름이다. 제주의 모든  언덕은 모두 오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역시 육지의 느낌하고는 역시 다른 무엇이 있다. 산책길로는 참 좋은 곳이다. 힘들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오르니 제주시의 북쪽 앞바다가 탁 트이게 보인다 앞쪽의 봉우리가 도두봉이 분명하다 그 앞에 공항이 있는 걸 보니... 지난번 도두항을 지나 꼭대기에서 바라보던 공항이 저곳이구나 싶다. 왼쪽으로도 많은 아파트가 보인다. 제주도 꽤 많은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다.  저 봉우리 더 왼편은 이호 태우 해변 이리니... 뿌연 제주 바다를 보며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뽀로리가 그립다. 아들 녀석도 생각난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각난다. 아 몇몇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인생의 시간들을 할애하며 웃으며 술도 먹고 또는 모른척하며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겠는가. 


때로는 멀리 해외에 나가 사는 친구들도 있고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아무런 인연의 고리를 연장시키지 않고 제 멋에 그대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천천히 내려가며 숲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기분 좋은 일요일 오후를 보낸다.  사무실에 나가려다 잠시 쉬자는 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윽고 저녁이 왔다. 더 누워있고 싶다.


묵언수행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없이 묵언할 수 있는 배경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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