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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03. 2017

1100 도로로 넘는 한라산길

2016년 5월 4일

푸르른 날씨를 맞이하는 기분이야 늘 반가운 일이지만 장소에 따라 기쁨과 감동의 수준은 배가한다. 


1100 도로로 제주와 서귀포를 넘게 되면  종종 제주의 속살을 너무 쉽게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노형 쪽에 사무실이 있다거나 평화로가 꽤나 막히지 않는 한 이 길을 택할 이유는 점점 줄어든다. 그래도 가끔은 차에 무리를 주어서라도 이 길을 선택하고픈 순간이 있다.


사무실이 노형로터리에 있었던 시절. 무심히 선택한 서귀포 가는 길을 평화로로 선택하게 되면 왠지 업무만을 중시하고 다른 사항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위축감마저 든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혹은 거침없이 한라산 방향으로 차를 틀어 서귀포로 향해가면 된다. 

급하게 서귀포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약간의 여유를 부리며 1100 도로로 방향을 들었다. 시간이 늦어지게 되거나 하더라도 이 푸르른 날을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면 그 유혹을 멈출 수가 없다.


푸르름이 채 극성의 단계까지 오르지 않았지만 이만큼의 푸르름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심 이상도 아니게 된다. 그 욕심을 부려봐도 좋을 날씨임은 분명하지만...


오르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울 수 없는 순간들이다. 뭐 그리 좋은 일도 없지만 날씨가 주는 청명감은 분위기를 띄우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지금의 목적지가 사무실로 귀환하는 일이라 가야 할 거리가 짧아진다는 안타까움이 남아있을 뿐이다.

어릴 적 동네 오락실이 생기던 초기 시절 자동차 운전을 하는 기기가 있었다. 도로가 표시된 구불구불한 길이 무슨 롤러 같은 장치로 계속 돌아가면 그 위를 모형의 자동차가 움직이며 핸들을 돌리며 운전을 하던 시절이었다. 자동차 운전 시뮬레이션 오락의 초기버전이었던 것이다. 지역의 놀이공원에 가면 볼 수 있던 오락기구였던지라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에 동전 하나를 얻어들고는 신이 나서 그 앞에서 열심히 핸들을 돌렸던 기억이 있다.


핸들은 조금만 돌려도 차의 방향이 바뀌는데 그러다 보면 도로에서 벗어난 자동차는 엉뚱한 곳으로 가고 도로를 따라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핸들을 좌우로 돌리던 노력을 꽤나 했었다. 미세한 핸들 조작이 큰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시절이었다. 


이후 제대로 된 전자오락이 나오고 다양한 자동차 경주도 나오곤 했지만 그 당시 실물을 움직이며 자동차 운전 오락을 하던 시절의 생동감이 가장 좋았던 기억이다.


1100 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 운전연습 오락의 현실 모델을 보는 듯하는 묘한 시간의 과거회귀를 느끼는 것이다. 더구나 주변에는 숲으로 둘러싸여 다른 방해 요인이 전혀 없다. 천천히 차를 몰다보면 뒤에서 따라오는 차가 불만이 가득한지 내차의 뒤꽁무니를 바짝 붙어 온다. 넓은 내리막이나 오르막 차선이 나오면 살며시 옆으로 차를 비켜준다. 마치 자동차 경주라도 하듯 쌩하며 내 차를 지나기 일쑤다.

이윽고 1100도로의 중심지인 1100 고지 휴게소에 닿는다. 좋은 날 한라산을 조망하고 넓은 벵디를 구경할 수 있는 정자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탁 트인 풍경이 가슴의 뭔지 모를 응어리를 풀어주는 느낌이다. 근데 웅어리진게 뭐였더라? 뭐가 응어리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풀어졌으면 다행이다.


날씨와 경치에 취해 서성거리던 시간이 지나고 가던 길을 다시 가려던 순간 자전거 여행객 복장을 한 친구가 계속해서 히치하이킹을 하며 지나는 차를 세우고 있다. 뭐가 문제가 있나 싶어 창문을 내려 묻는다. 신기한 일은 일행이 둘인데 한 명은 자전거를 한 명은 단순한 여행 가방을 메고 있다.

좋은 날 한라산을 조망하고 넓은 벵디를 구경할 수 있는 정자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탁 트인 풍경이 가슴의 뭔지 모를 응어리를 풀어주는 느낌이다

자전거 여행객이 아닌가? 두 명의 젊은이들은 죄송하지만 아래까지 자전거와 자신들을 실어줄 수 있느냐는 간곡한 부탁을 해왔다. 대두분의 차들이 자전거까지 실어 날라 주기가 쉽지 않을 터 여러 명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분위기다. 약간의 고민 끝에 뭐 이렇게라도 좋은 일 한 가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두 명을 태우기로 했다.


자전거를 분해해 앞바퀴를 떼어내서 뒷좌석에 싣고 한 명이 자신의 자전거 사이에 잘 꾸겨 앉는다. 다른 한 명은 앞자리에 타니 그리 못 태울 일도 아니다.


친구인 두명중 한 명은 자전거 여행 중 1100도로까지 어찌어찌 올랐고 한 명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곳에 내렸다는 이야기다. 같이 만난 거는 좋았는데 자전거를 타는 친구 말로는 바람이 너무 거세고 자전거가 너무 흔들여 내려가기 겁난다고 태워달라는 이야기다. 올라오기까지 했는데 내려가기 겁이 난다는 말에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아마도 나름 꾀를 낸 것이 아닐까 싶다. 암튼 친구 둘이 같이 자동차를 타고 내려가니 그들은 또 아래에 가서 다시 만나서 다음 일정을 소화하는 일보다 번거로움이 줄었다. 


젊은 친구들은 연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지간히 사람들이 태워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럴 때 괜히 잘난 체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건넨다.


"나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작은 일이라도 해주면 돼요."


괜히 잘난 체 한 듯해 조금은 멋쩍지만 그렇게라도 말을 끊고 제주시내로 내려간다. 다시 자동차 운전 연습하듯 천천히 내려가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며 날 좋은 1100도로는 마음에 흔치 않은 위안이 된다는 사실에 하루가 상쾌해진다. 이런 날이 자주 있으면 좋으련만 날씨도 날씨지만 그 시간에 맞춰 1100 도로를 오르는 기회가 같이 맞을 경우는 쉽지 않다. 좋은 조합을 가진 하루여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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