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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22. 2017

비 오는 날 저지 가는 길_올레 13코스

2015년 4월 18일

비가 올 줄 알았다. 일기예보에서 많은 비를 예상했으므로. 그럼에도 가기로 했다. 오늘은 어떤 경우에도 13코스를 가보련다. 일단 저지마을회관까지 가서 차를 정차시키고 처음의 출발지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저지마을은 올레 길중에서 가장 많은 코스가 겹치는 곳이다. 13코스의 종점이자 14코스의 출발점 그리고 14-1코스의 출발점이라는 특이한 장소라는 점도 의미있지만 교통이 더럽게 불편하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모로 방문이 망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한 시간여를 차를 몰아 마을회관 앞에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마을이다. 예술인 마을이라는 설정답게 조금은 더 극적인 입구를 상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마을 입구에 커다란 팽나무가 서 있는 것은 나를 반기는 듯했다. 나는 제주의 팽나무가 좋다.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고 신이 깃들여 있는 나무들도 있다. 그런 상징이 있다는 것은 마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술인 마을이라는 설정답게 조금은 더 극적인 입구를 상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린다. 우산을 들고 갈까 아니면 어렵게 구입해놓은 우비를 쓸까 고민하다가 우산이 장우산이라는 점 때문에 과감히 우산을 차 안에 던져놓고 나왔다. 이제는 버스를 기다릴 시간이다. 어느 버스가 있는지도 헷갈린다. 버스시간표를 보니 967번을 타고 금능리까지 가서 702번인 서일주 버스를 타면 될 듯싶다.


버스가 반대방향으로 가버린 지 15분 후에 버스가 온다. 반갑다. 나의 예측이 어긋나지 않았으니 이제 저지리에 오는 길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얻은 셈이다. 다음에 올때는 시청에서부터 어떻게 오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금능리에서 내리자 한가한 바닷가 시골 마을의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여기는 아직까지 날씨가 좋다. 8분 후 버스가 왔다. 용수리가 목표다. 지난번에 반대편 버스를 타기는 했지만 한림부터 한경 고산 용수 등은 상당히 낯선 지명이자 경험이 없는 방문지이다. 20여분간 버스를 타고 '노인네들의 천천히 내리기'를 경험하면서 버스는 쉼 없이 제 갈길을 간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버스의 안내방송이 아주 친절하게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용수리에 내리자 지난번 비를 쫄딱 맞고 힘들게 버스를 탄 순간이 기억난다. 저녁 6시가 다되어 몸이 젖은 채로 버스를 타고 1시간 20여분을 갔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일주일 전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원래 길로 감으로 인해 조류독감이 번지도록 하는데 일조한다면 그것 만큼 멍청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횡단보도를 건너 13코스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용수포구에서부터의 첫 거리는 지난번 걸은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어차피 버스를 타기 위해 올레길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입구에 보니 조류독감으로 올레길의 일부가 통제가 된다는 팻말이 보인다. 괜스레 중간에 막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그래도 길들이 차분하니 중산간을 향해 있어 그런지 마음이 편안하고 다른 마을의 올레길보다 고즈넉한 기분이 더욱 돋보인다. 처음에는 그랬다.


용수 호수 옆을 돌아가는 길을 우회 표지가 보인다. 물론  조류독감 탓이다. 색깔이 엇비슷한 올레길 리본을 우회길로 달아놓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원래 길로 감으로 인해 조류독감이 번지도록 하는데 일조한다면 그것 만큼 멍청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쉬운 호수길을 옆에 두고 아스팔트 길을 우회하며 원래의 길을 찾아들었다.

특전사 길이란다. 도로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간다. 아주아주 자그마한 숲길을 내었다. 특전사들의 도움으로 이 길을 내었다 하니 특전사 길이겠거니 하고 걷는다. 원시림 분위기가 나면서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다. 오호... 이런 맛에 숲길을 지나는 것이 아닐까. 숲의 구비구비를 지나면서 아주 특별한 이벤트랄 것도 없지만 매번의 풍경이 아주 포근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숲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후로도 몇 번의 많은 숲을 지났지만 왠지 모르게 특전사 숲이 생각나는 것은 이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하늘에서 멀어지는 듯한 구름이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점차 하늘의 색깔과 구름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냥 맞으며 걷기로 했다. 잠시 다시 비가 긋는다. 다행이다 싶은데 하늘의 구름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그래도 참아보자 특별히 우비를 꺼내야 할 만큼 비가 세게 쏟아지지는 않는다는 판단을 했다. 또 다른 숲길로 들어가기 직전 빗방울이 굵어지고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다. 잎사귀 넓은 나무가 있다는 것은 몹시나 위안이 된다. 얼른 우비를 꺼냈다. 괜스레 우산을 두고 왔나 싶다. 우비도 입고 우산도 쓰면 좋지 않았을까... 우비를 그냥 입으면 몸에 잘 맞을 텐데 등의 배낭까지 둘러서 입도록 해놓으니 앞 단추가 자꾸 열린다. 우비가 작은 소아용으로 변신해버린 느낌이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르면 길을 걷는다.

몇 번의 많은 숲을 지났지만 왠지 모르게 특전사 숲이 생각나는 것은 이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하늘에서 멀어지는 듯한 구름이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점차 하늘의 색깔과 구름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걷는 도중 조수리 마을의 깜찍한 쉼팡을 만날 수 있었다. 숲의 끝물에서 마을의  청년팀들이 올레꾼들을 위해 무료 커피와 차 그리고 물과 블루스타를 준비해 놓은 것. 이 얼마나 깜찍한 서비스인가. 한참을 지쳐서 걷는 와중에 숲 속에서 블랙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쁨이란 그 무엇과도 바꾸기 쉽지 않은 경험이다. 물이 거의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블랙커피 한잔은 충분히 끓일 수 있었다. 너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다양한 컵들의 표현을 벽에 붙여놓은 광경을 감상하며 몇 장의 사진을 핸드폰에 남겼다. 고마운 일이다. 이 같은 고마움을 다른 사람들도 거의 같이 느껸던 바 충분한 감사의 말의 성찬을 벌려놓았다.


특전사숲길의 안내판이 숲입구를 가르키고 있다.

사실 숲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그 이후로는 비가 너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성을 잃을 뻔했다. 길도 잘못 들고 비를 피하려는 나의 의지는 2000원짜리 우비로는 역부족이다. 온몸 곳곳에 스며드는 빗물이 오한을 들게 하더니 안쪽의 옷들도 조금씩 젖어들어간다. 우비가 너무 작다. 판초의를 사라는 권유를 받아들일 걸 그랬다. 그랬으면 오늘과 같은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도 가기 전에 맞이하는 폭우는 나의 의지를 상실하게 했다. 무엇보다 변변한 사진 하나 남길 수 없는 상태에서 옷은 젖어간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가 간절히 생긴다.


이 코스의 중간지점에 낙천리가 있다. 아홉굿마을이라는 명칭과 의자공원이 마을의 콘셉트이다. 중간에 만나는 쉽터스러문 건물의 처마 밑에서 오늘 처음으로 천천히 쉼을 즐긴다. 우비를 벗고 배낭을 내리고 지나가는 올레꾼과 몇 마디 이야기도 나누고  시간을 즐기는 사이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됐다.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 보조 배터리를 교체하려다 핸드폰의 커버와 배터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무엇보다 변변한 사진 하나 남길 수 없는 상태에서 옷은 젖어간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가 간절히 생긴다


물에 젖을라 얼른 줍는다. 순간 핸드폰 커버에 있어야 할 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설마 하며 지감과 명함지갑, 가방의 곳곳을 다 뒤졌는데 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카드란 흔히 쓰는 은행 카드가 아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의 공동현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키다. 이것이 없으면 건물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데다 그 건물은 3층까지 일반 사무실이고 위층이 숙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퇴근한 상태에서 숙소 키를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가끔 건물의 근무자들이 토요일에 근무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지만 오늘은 날씨가 이모양인데 그래도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나마 그 사람들이 있어야 벨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수 있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엉망이다. 빨리 집에 가서 근무자들이 퇴근하지 않았을 때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래야 방 어딘가에 있는 현관 카드를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없으면 나는 월요일 오전까지 그 건물 안에 다시 말하면 내 방에서 잠을 청하며 주말을 보낼 수 없다. 이런... 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비는 내리는데 발걸음은 계속 느려지고 나의 머리는 이미 올레길의 의미와 걷기를 통한 제주 느끼기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원래는 저지에 도착해서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곽지에서 지인이 오픈한 월남 쌀국수 집을 오픈 기념으로 방문하기로 한 계획이다. 그래서 여벌의 속옷부터 팬티 티셔츠 등을 다 챙겨 오지 않았던가. 비를 맞을 각오를 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바뀌었다. 무조건 숙소로 가야 한다.

지나가는 트럭 운전수가 이런 날씨에 혼자 걷고 있는 나를 보면 안쓰럽거나 이해가 안 되는 듯 뻔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저지마을회관까지는 너무나 멀다. 저지오름도 올라야 하고 비에 질척이는 길이 도무지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다. 내 신발은 물이 샌지가 오래되어 이미 양말의 발목 부분까지 모두 젖어있다. 걷는데 발이 아프다. 아... 짜증 지나가는 트럭 운전수가 이런 날씨에 혼자 걷고 있는 나를 보면 안쓰럽거나 이해가 안 되는 듯 뻔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이 원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며 바람 부는 날 변변한 우비도 아닌 채 왜 저리 처량 맞게 걷는 것일까 하는 말이 내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아! 그래도 발길을 재촉해야 한다.


저지 오름을 한 바퀴 돌고 마을 회관을 향해 내려가니 종착점이 보인다.  시간이 없다. 저 멀리 세워놓은 차가 보인다. 저지마을은 날 맑은 날 새로운 기분으로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차를 몰고 시청 앞까지 마구 몰아 댔다. 그래도 한 시간이 걸린다. 집 앞에 도착해서 무엇보다 2층이나 3층에 불이 켜져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2층이 불이 켜져 있다.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가방 등을 챙긴 채 재빨리 인터폰을 눌렀다. 안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차,   3층을 눌렀다. 다른 벨을 누르니 사람 목소리가 나온다.


"죄송한데요 위층에 사는 사람인데 카드를 놓고 나왔네요. 문 좀 부탁합니다."

다행히 해가 막 지기 전 곽지의 바닷가는 어둠 빛 바다의 풍취를 충분히 전해주며 나를 맞았다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정중히 부탁을 하니 철컥하고 자동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왔다. '와. 만세!' 안에 들어왔다.


도어록 2개를 연후 집안에 들어섰다. 이곳저곳을 찾다 다 실패했다. 혹시나 싶어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카드가 잡힌다.  이 카드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진 적이 없다.


샤워를 한 후 곽지로 다시 향했다. 배가 고플 법도 한데 배고픈 것을 잊었다. 다행히 해가 막 지기 전 곽지의 바닷가는 어둠 빛 바다의 풍취를 충분히 전해주며 나를 맞았다. 베트남국수가 나를 기다린다.

힘든 하루다. 걸음도 너무 힘에 부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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