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구리 Nov 25. 2017

저지에서 한림까지_올레 14코스

2015년 5월 16일

지난주에 못 간 올레길 14코스를 한번 더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로 찾아들었다.


아침 8시부터 전화가 온다. 어제 쓴 기사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니 저절로 잠이 깼다. 눈은 여전히 피곤한데 잠은 달아나 버렸다. 이런 젠장... 일찍도 전화를 해대니 나로서는 토요일 오전의 단잠을 놓쳐버린 셈이다. 

신엄에 내리는 할머니와 나이 드신 분들이 내릴 때면 버스가 한 세월은 멈춰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슬아슬하다. 오늘따라 왜 이리 버스 운전수가 출발시간을 잘 지키는지 도대체 텅 비어있는 버스 플랫폼이 허탈함을 더해준다. 또다시 20분을 기다려야 한다. 아~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는 20분이다. 10분 여가 지나 들어온 버스에 앉았으려니 사람들이 가득하다. 일주선을 타는 할머니와 관광객 티가 너무나 나는 젊은 여성들이 한 무리 가득이다. 가는 곳들도 가지가지다. 신엄에 가는 사람들. 애월읍에서 내리는 사람들. 잘은 모르지만 고내포구에 잔뜩 기대를 안고 버스에 내리는 사람들. 하귀에 내리니 마중 나와있는 사람들과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는 아가씨들... 신엄에 내리는 할머니와 나이 드신 분들이 내릴 때면 버스가 한 세월은 멈춰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다리를 굽히거나 올리기에 힘들어 저렇게 천천히 움직이겠지. 그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터지듯 아프다.

내가 가는 목적지는 아직 멀다. 지난주에 이미 한림항까지 다녀왔으니 가는 버스길은 이제 익숙하다. 어디에서 내릴지도 알고 있고 가는 길이 다소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금능리에 혼라 썰렁하니 내리니 젊은 청년들 2명이 나와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967번을 타고 오설록에 가려하는 의지가 보인다. 나 같은 올레꾼들이 아닌 바에야 차림에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보인다. 이곳에서 가려는 곳이 오설록 말고는 없으니 말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마 파크와 라온 레저타운 등을 멋쩍게 쳐다보며 저기 아는 지인이 있는데 언제나 가서 만나보려나 싶다.

 지난번처럼 날씨가 우중충하지도 않고 아주 뙤약볕도 아닌지라 걷는 느낌이 상쾌하다

목적지인 저지리 마을회관에 내렸다. 이제는 이곳이 낯설지가 않다. 나는 국토지리나 인문지리나 그 동네의 전후 사정에 대해 머릿속에 잘 그려져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성격을 타고난듯하다. 지도를 보고 지난번에 다녀온 기억을 더듬고 다시 지도를 보고 또 보고 하니 이곳 풍경의 사진도 덩달아 보게 되어 이제 익숙한 기분이다. 물론 벌써 3번째 오기도 했으니 낯설지 않은 것은 일견 당연한 사실이다.


올레길은 처음부터 옆 샛길로 빠져가며 저지오름 오른쪽 길을 향해 간다. 마을길과 과수원을 지나면서 오붓한 느낌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번처럼 날씨가 우중충하지도 않고 아주 뙤약볕도 아닌지라 걷는 느낌이 상쾌하다. 구불구불 마을길 이곳저곳을 지나다 보니 토끼풀이 쫙 깔린 길도 나오고 이름 모른 노란색, 아마도 애기똥풀 같은 느낌의 꽃길이 나오기도 한다. 호젓하다. 천천히 걷는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는 이정표가 불필요하다. 마을 주변의 길들을 구비구비 돌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관계로 이곳저곳을 지나며 보이는 올레길 표시가 나를 이끈다. 그래서인가. 특이한 모습을 생각해내기가 쉽지 않다.


이곳에도 개발의 광풍이 부는지 올레길의 팻말이나 리본이 지나는 길목에 여지없이 커다란 공사의 흔적들로 움푹 패이 거나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나야 객이지만 진정 자신들의 동네에 대한 영역표시의 느낌을 명확히 해준다

도로변에서 강아지 두 마리가 아주 정답게 노니는 장면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든다. 녀석들은 오는 차를 빤히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피하기도 하면서 나를 앞질러 제갈길을 가고 있다. 녀석들이 갑이다. 나야 객이지만 진정 자신들의 동네에 대한 영역표시의 느낌을 명확히 해준다.


여기가 어디쯤 인지도 모르게 지나는 길에 눈을 확 띄게 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3월 말에 왔으면 여기도 장난이 아니겠는데 싶다. 청보리가 이미 다 익어 5월의 황금들판을 제공하고 있다. 아,,, 보리밭의 황금들판도 이런 느낌이 드는구나. 한 군데서 마음을 주고 다음으로 발길을 옮기면 곧이어 또다시 보리밭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을의 뙤약볕에서 보는 황금들판과 추석과는 전혀 다른 5월의 황금들판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나만의 비밀을 제공해 주는 신비로운 느낌이다. 지금 나 아니면 누가 이 기분을 알랴...


수로 옆을 걷는 호젓한 풀밭 길이 계속 이어져 있다. 설마... 했는데 이 길은 이후로 계속해서  수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를 건너게 하더니 바다로 향하게 한다. 헉, 이런 더 이상의 변화가 없다는 게 놀랍다. 한쪽이 호젓한 길이면 반대편은 시멘트 포장을 한 길이다. 번갈아가면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추석과는 전혀 다른 5월의 황금들판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나만의 비밀을 제공해 주는 신비로운 느낌이다

중간중간 선인장 밭이 자꾸자꾸 들에 들어온다. 찔레꽃도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질레꼿이라는 서글픈 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있다는 게 사실 괜스레 마음이 허무하거나 아련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꼿이 피는 주변의 풀들이 정갈하다거나 화려함이 아닌 잡초스러움은 한가운데라는  사실 때문이다. 바닥에 깔려있는 토끼풀스러운 이름 모를 꽃과 풀밭도 어릴 적 놀던 시골마을의 도시의 개발 이전 느낌을 생각나게 한다. 나에게도 동심이 있었는데 그게 벌써 40년 전이라니... 아구아구


한참을 걷다 재미있는 풍경을 만났다. 보리밭 사이사이로 바위나 흙덩어리들이 띄엄띄엄하게 놓여있다. 자세히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 사이를 이 바위들이 사사삭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모습이다. 한두 개의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10개는 족히 넘을 바위들이 위에는 온갖 풀과 잡목들을 뒤집어쓴 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바위섬이 보리밭을 수영한다.


갑자기 다도해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한다. 아주 보기 드문 경험이다. 마치 저 녀석들 사이에 곧 풀로 은폐한 누군가가 뚜껑을 열고 머리를 쑥 하니 내보낼 것 같다. 아마도 아직은 감성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는안도감이 생긴다. 이 길 재미있다. 특히 이 바위가 있는 자리는 보리밭 사이를 스치고 움직이는 바위라는 생각과 환상이 닫히지를 않는다.

 마치 저 녀석들 사이에 곧 풀로 은폐한 누군가가 뚜껑을 열고 머리를 쑥 하니 내보낼 것 같다

그렇게 바다를 향해 걷고 걷다 보니 저 멀리 선인장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저기서부터는 계속해서 바다를 향해 걷는 길이다. 그러고 보니 반 정도는 온 것 같다.


바다로 나온 발걸음은 탁 트인 시원함에 가슴을 열게 한다. 한동안 바닷가에 갖춰진 돌의자에 앉았다. 배당을 풀어놓는다. 이 놈의 바다는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치유는 하지 못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나 무엇을 해 왔는지 혹은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를 순간순간 잊어버리게 하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다의 힘이다.

멀리 비양도가 보이고 한림항이 보이고 그 사이에 협재가 있다. 그 사이를 두고 바다는 여전히 나의 곁을 계속 따라온다. 


월령리의 선인장 자생지를 지나 자그마한 포구로 들어섰다.  뜬금없는 벼룩시장스러운 좌판이 몇 개 보인다. 이 장터의 정체는 뭐지... 카페와 아이를 몇 명이 그 앞에서 놀고 있고 좌판을 벌여놓은 여성들 몇 명이 도란도란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길을 지나갈 사람들이 없을 터인데 아무것도 아닌 물건들 몇 개를 펼쳐놓고는 벼룩시장처럼 앉아있다. 가서 말 걸기도 낯선 느낌이 들어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를 지나쳤다. 이 포구를 지나면 계속되는 바닷길이 이어질 것이고 비양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계속 걷기만 할 뿐이다.

그 사이를 두고 바다는 여전히 나의 곁을 계속 따라온다

괭생이모자반이 바다를 메웠다. 포구의 구석구석까지 해조류가 가득가득 밀려들고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해변으로 물놀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다. 아, 저 먼 바다의 깨끗함이 낯선 푸르름으로 가득 차니 그 푸르름이 기쁘지 않다. 해초 사이의 바다가 나를 부른다. 나도 얼른 저곳으로 가고 싶다. 금능해변과 협재해변이 코앞이다.


해변이다. 모래가 밟히는 해변이다. 길을 걸을 이유가 없다. 성큼성큼 해변을 걷는다. 혼자 걷는 게 아쉽다. 누군가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협재를 뒤로 하고 한림항을 향해 걷는다. 이제 해변은 없다. 점차 마을의 느낌과 항구의 느낌이 함께 다가온다. 힘이 든다. 배도 고프다. 뉘엇거리는 오후의 스산한 한림항을 향해 걷는다. 재빨리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이 더 반갑게 다가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에 걷는 올레길 15코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