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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28. 2017

태풍 찬홈 속 바다 걷기

2015년 7월 11일

금요일에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말에 바닷가를 걷자 한다.

나야 혼자 걷는 것보다는 둘이 걷는 게 덜 심심하고 동행이 있다는 편안함이 있기에 흔쾌히 O.K.


동쪽과 서쪽을 고민하다가 저녁 식사의 목적지가 있는 서쪽을 걷기로 했다.


문제는 2가지다. 그 전날의 숙취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태풍 찬홈이 몰아닥치고 있다는 사실. 혹시나 싶어 어쩌랴 싶은데 걱정 말고 걷잖다. 나 역시 비 오는 날의 제주 걷기는 사실 귀찮고 구질구질한 느낌이지만 출발지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걷자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예상대로 금요일의 술자리는 한밤중인 2시 30분에 끝났다. 물론 시작을 늦게 했지만 그래도 몸이 힘들다. 오전에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아직 8시도 안된 이른 시간이다. 아 피곤하다. 오전까지 푹 자고 싶지만 그게 내 맘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다.


뒹글 거리던 시간을 지나 10시 40분에 터미널에서 출발. 비 내리는 길을 무시하고 이호태우에서 내렸다. 해안길을 걷기로 했다.


비가 들이친다. 바람이 거세다. 서서히 온몸이 젖어간다. 우산밖에 없는 상황. 이 우산으로는 바람을 막을 수 없다. 우비가 필요하다. 결국 외도동을 걷다가 하귀농협에 머물렀다. 어렵게 우비를 구입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이제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


바다와 하늘과 비와 눈물과 땀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속에 발걸음이 바쁘다. 지난주에 걸었던 구엄과 신엄 그리고 고내리 해안길을 다시 거꾸로 걷고 있다. 맑은 하늘과 달리 뿌연 하늘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슬프지 않다. 걷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인가. 지나는 차들이 가끔 우리를 보고는 힐긋힐긋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이런 태풍 몰아치는 날씨에 해안가 걷기라니. 참 어이가 없다 싶을 것이다.

가끔 개념 없이 높은 물을 튀기고 지나는 운전자들을 욕하면서 계속 걷는다.


고내리를 지나 애월항까지 내달기 전 해녀의 집이 나타난다. 비바람 몰아치는 시간에 간단히 멍게와 소주 한잔으로 시간을 달래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허허롭다. 음. 이 기분이란.


짐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발길을 내디뎠다. 한결 발걸음이 가볍다. 이 기세라면 곽지까지 금방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도상 시간은 2시간 남짓. 지금 시간이 4시쯤이니 저녁시간에 닿을 수 있을 듯싶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일행이 중간에 발뒤

꿈치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걷기는 애월에서 포기 차를 타고 곽지까지 한순간에 나섰다. 이제 저녁 먹으며 편하게 지내면 좋다. 웬걸... 식당 문이 닫혀있다.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다. 전화를 하지 않고 온 것이 패착이다.


급히 식당 사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태풍으로 손님도 없고 비와 바람이 많이 불어 한참 전 문을 닫고 지인 집에 놀러 갔단다. 왜 연락 안 하고 왔냐고 혼났다. 미안하다며 다음에 오라 한다. 아뿔싸, 이런 일이 저녁을 근처 국숫집에서 간단히 해결하고는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다. 일행이 일단 조금 더 걷자고 한다. 그러나 이미 걷기에는 대세가 넘어간 상황. 오는 버스를 잡고 금능해변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숙소를 잡아보자는 욕심이다. 협재보다는 조금 덜 복잡할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저녁 바다가 있는 금능은 호텔 하나와 게스트하우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조용하다. 게스트하우스는 이미 만원이고 호텔 외에는 숙소가 없다. 망설이다 결국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성수기라 비싼 비용이지만 바다가 보인다. 파도소리가 들린다. 비바람이 몰아친다.


창가에 앉아 비바람을 맞아도 기분이 좋다. 얼마 만에 맞이하는 바닷가 숙소의 상쾌함인가. 이미 저녁까지 해결했겠다  이날 저녁과 밤이 한없이 여유롭다. 다만 배낭이 젖어 갈아입어야 할 옷들이 모두 젖었다. 속옥부터 반바지에 티셔츠는 물론 수건까지 배낭 모두가 젖었다. 다행히 시집 한 권을 비닐에 쌓아 넣어 책만은 무사하다. 휴~~


새벽의 바다를 보며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 기억도 못한 채 그냥 바다를 바라보는 내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태풍 속의 제주 걷기는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날은 오일장이다.

태풍이 지난후의 금능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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