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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Sep 17. 2018

달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다

유건에(이)오름의 표지판대로 걸은 하루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이다. 얼마 전부터 제주의 동남쪽을 기웃거려보기로 하고 나선길이 몇 번의 오름을 찾게 했다. 이름만 들어봤던 유건에오름을 찾아 나섰다. 유건이 혹은 유건에라고 표기하고 있다. 지도상에서 보니 그다지 어렵지 않은 코스이고 가끔 지나가던 길목에 있었는데 이정표가 없는 때문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농로로 들어선 길에는 뜻밖의 난산 에코힐링 마로코스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이곳이 오름 입구로서 틀리지는 않은 듯싶은데 여전히 미심쩍다. 들어오는 길에서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유건에오름을 둘러싸고 길이 뱅글뱅글 둘러쳐 있는 게 아무래도 표현하는 방법상의 차이인 것으로 인식된다. 일단 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기로 한다. 오름 주변을 돌아가며 농로가 이어지는데 딱히 여기서부터 오름 입구라는 표식이 없다. 내친김에 크게 길을 한바뀌 돌아본다. 다시 원위치다. 돌아보면서 반대편을 생각해보니 그곳이 메인 입구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도 얼마 크지 않은 오름이니 어디서든 동네 한 바퀴 돌듯 하면 될 듯하다.


차를 몰며 적당한 주차장소를 찾고 있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분명 저 멀리 제주시 방향으로는 파란 하늘도 보이는데 이곳은 짙은 구름이 잔뜩 인채 분위기가 의미심장하기 이를 때 없다. 이윽고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탐방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빗방울이 쏟아지면 어쩌란 말인가. 도무지 개운치가 않다.

돌아보면서 반대편을 생각해보니 그곳이 메인 입구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도 얼마 크지 않은 오름이니 어디서든 동네 한 바퀴 돌듯 하면 될 듯하다

더 이상 오름 주변으로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곳에 차를 세우니 나름 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한여름의 열기와 습기를 함께 머금고 있다. 몇발짝을 걸아가본다.  발길 닿는 곳에 야자매트가 깔려있는 것이 확실한데 자라난 풀의 길이가 허리를 넘어선다. 순간 이 길이 맞나 싶다. 그래도 매트를 깔아놨으니 길은 맞겠지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어느덧 기둥에 줄을 쳐가며 길을 안내한 너른 길이 나온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인 모양이다.

길을 잃어버릴 걱정도 없이 넓은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처음에는 오름으로 오르나 싶은데 길의 흐름이 영락없는 둘레길이다. 어쩔 수 없이 오름을 한 바퀴 다 돌아야 하는 모양이다. 어딘가에 오름 오르는 길로 갈라질 것으로 여기고 걷는데 길 가운데 올라온 풀들이 심상치 않다.


중간에 언뜻 보이는 풍경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멀리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빛이 만들어낸 오묘한 풍경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기는 이토록 찌푸등하니 하늘이 흐린데 멀지 않은 곳의 하늘은 오묘한 매력을 품어내는 중이다.

처음에는 오름으로 오르나 싶은데 길의 흐름이 영락없는 둘레길이다. 어쩔 수 없이 오름을 한 바퀴 다 돌아야 하는 모양이다

회색빛 건물이 잔뜩 시선을 가려 어딘가 싶다. 물의 도시 베니스랜드라는 테마파크다. 왜 이곳에 베니스랜드? 제주에는 참 다양한 위치에 다양한 관광지가 많다.  길을 걸으며 이정표로 삼으면 되려나.

오름 둘레길이 계속되는 곳에 마침내 이정표가 나왔다. 아까와 동일한 표식에 현재의 위치 표시만 다르다. 오름의 정반대 위치에 와있다. 그러고 보니 오름 맨 바깥의 둘레길을 돌아온 셈이다. 앞에 오름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나를 맞는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처럼 멋진 표현이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상을 향해 가는 길목이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르는 도중 양 옆으로 또 다른 길이 갈라진다. 이곳은 오름 중간을 도는 둘레길이지 싶다.

여기는 이토록 찌푸등하니 하늘이 흐린데 멀지 않은 곳의 하늘은 오묘한 매력을 품어내는 중이다

힘들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고 보니 정상이다. 정상인 것은 산림감시 초소가 있기에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길이 갈린다. 한쪽은 정상의 분화구를 탐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상에 왔으니 분화구를 한 바퀴 돌아야지. 왼쪽 길을 선택해서 분화구를 돈다. 풍경의 변화가 없다. 특별할 것이 없는 오름이다. 나무로 시선이 가려져 있으니 풍경의 맛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먼 둘레길에 비하면 짧은 코스이긴 해도 특별한 차이가 없는 길을 다시 한 바퀴 돌아보려니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다시 원위치.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간다. 그런데 어쩐지 이 길을 가다 보면 원래대로 중간 길을 한 바퀴 또 돌아야 할 모양이다. 반 정도 돌고 나무계단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고민하게 된다. 내가 가는 중간 둘레길을 한 바퀴 돌게 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아래로 내려가고 나머지 반대편 둘레길을 돌게 되면 이정표에 나와있는 모든 길을 다 걷게 되는 셈이다. 이제 서서히 지쳐가는데 그 행동을 하자니 머뭇거려진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밑으로 내려가서 둘레길을 크게 돌 것인가. 중간 둘레길을 돌고 원위치로 와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큰 둘레길을 돌 것인가. 후자의 경우 운이 좋으면 원래 출발했던 주차장에 조금 더 가깝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중간을 돌고 크게 도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어찌 보면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지치거나 불확실성이 심해지면 모험을 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내가 중간 길을 택했다면 가장 멀리 도는 바깥길을 돌지 않고 원래의 출발지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길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중간 둘레길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연결통로가 없었다면 지금의 선택지로 다시 돌아와 아래로 내려간 후 다시 가장 먼 둘레길을 돌아 주차장이 있는 곳을 가야 하는 이중의 노고를 겪게 된다.


밑으로 내려가서 둘레길을 크게 돌 것인가. 중간 둘레길을 돌고 원위치로 와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큰 둘레길을 돌 것인가

나의 선택은 조금 돌더라도 확실한 가장 먼 둘레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현실과 타협하는 길이다. 유건에오름에 와서 참 희한한 죄수의 딜레마를 배운다. 선택이란 불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이 선택 아니 나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확신도 함께 배우게 된다.

그러고 보니 커다랗지도 않은 오름을 한 시간 넘게 계속 돌고 있다. 힘이 빠지면 지친다.

아는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오름에 갔다면서 어딜 다녀오셨나?"

저녁 무렵이니 당연히 하루의 일정을 마칠 줄 알았을 테니 그리 묻는 것도 당연하다.

"아직 오름을 걷는 중..."

하루 종일 무리하지 말고 걸으라는 인사말이 왔다.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오름 서너 개쯤 오른 줄 알 것이다. 아직도 한 군데 오름 주변을 맴맴 도는 줄 모르고.


선택이란 불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이 선택 아니 나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확신도 함께 배우게 된다

한 번은 차로 크게 돌았고 다시 먼 둘레길, 분화구 한 바퀴, 중간의 둘레길(물론 이 길은 반만).

이러면 뭐하지만 이 오름이 오늘은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정표를 보며 달팽이처럼 생겼는데 왜 저리 뺑뺑 돌게 만들었지 싶었는데 내가 그 덫에 걸린 느낌이다.

오름 한 군데 다녀오면서 운동 열심히 한 주말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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