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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Apr 22. 2016

박쥐의 날개를 편 바굼지 오름_단산 2

박쥐의 양쪽 날개를 거닐다

세미물 옆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등산로보다 더 길이 잘 다져져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선충병에 걸린 소나무를 베기 위한 작업 차량이 드나들어야 하는 이유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아직 길이 제대로 마르지는 않았으나 질척거리는 곳을 피해가며 오를만하다. 산을 오르자 잘린 소나무들을 모아놓아던 자리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길은 조금씩 가팔라지며 흔적이 점점 줄어든다. 다만 잘린 소나무 밑동만이 이곳에 사람과 전기톱이 한바탕 난리를 피고 지나간 흔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이윽고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정상의 능선은 저 언덕 너머 바로인 듯 한데 길이 끊겼다.  고민이다. 내려가서 정상적인 오름길로 되돌아 오를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 풀숲을 헤치며 오를지...


이미 올라와 버린 거리가 아깝다. 뒤돌아보니 송악산과 바다 그리고 형제섬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이 경치의 순간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대로 밀고 오르기로 결심했다. 덤불과 나뭇가지를 헤치며 길이 없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덤불로 덮혀진 길 아닌 곳을 오르다 보니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났다.

정상의 능선은 저 언덕 너머 바로인 듯 한데 길이 끊겼다

어릴 적 반공교육을 받을 때 들었거나 보았던 이야기였다. 산에서 낯선 사람들이 내려오거나 운동화에 진흙이 잔뜩 묻어있는 사람들이면 무장공비일 가능성이 높으니 신고하라는 설명. 이를 알려주는 무장공비 선별하는 방법에 대한 표지판도 있었다. 순간 내 모습을 보면서 혹시 사람들이 나를 남쪽 섬 제주도에서 무장공비로 오인하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교육은 그래서 참 오래 남는다.


덤불을 헤치고 오르니 능선을 잇는 길이 바로 나온다. 망설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덤불과 풀, 나무에 가려 코앞에 길이 있는 지도 몰랐다. 내가 오른 곳은 왼쪽 능선의 날개쭉지에 가까우니 일단 왼쪽으로 가기로 한다. 박쥐의 날개 위를 걷는 셈이다.


암벽 왼쪽 끝자락 너머로 멀리 모슬봉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모슬봉 위의 건축물은 천문대가 아닌 군사시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나?


왼쪽 끝 봉우리에 다다른 후 길이 계속 이어져 있지만 그리로 내려가면 아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되어 다시 올라오고 싶은 않을 듯하다. 갑자기 뒤돌아 가!라고 스스로에게 외친다. 오던 길을 다시 지난다. 


길은 능선을 따라 다시 정상의 봉우리로 이어지고 순간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을 보니 나무계단에 동아줄로 잘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이 필시 원래의 정상적인 길이리라. 이대로 내려가면 다시 원위치로 가는 길일 테니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길은 정상의 바위산으로 향하며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한 순간 정상 위에 올랐다. 뒤편의 깎아지를듯한 바위가 그대로 내려다 보인다. 발이 떨린다.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원래 없던 이 공포증이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잘 사라지지 않는다. 어찌하면 이 두려움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정상에 앉아 한참을 쉬며 이곳저곳의 경치를 감상한다. 옆의 산방산을 비롯해 뒤편의 넓은 평야지대 그리고 앞의 평야지대와 바다, 좀 전에 보았던 모슬봉 방향의 또 다른 지형 등 탁 트인 풍광이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밖에서 보았을 때의 그 음울함은 산에 올라온 순간 여지없이 사라진다.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제주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암벽을 걸을 수 있는 지형이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바윗길로 이어지는 능선이 흡사 이곳이 서울의 관악산이나 북한산 자락 어디라고 착각을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는 오른쪽의 날개를 거닐 차례다. 왼쪽보다는 오른쪽 능선이 훨씬 박쥐의 날개를 닮았다. 능선의 기분도 더 살아있다. 길은 바위 사이에 내놓은 좁은 길로 이어지고 때로는 밧줄의 도움이 없으면 위험천만한 구조다. 그래서 인가 매우 높은 암벽을 타는 기분마저도 준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바윗길로 이어지는 능선이 흡사 이곳이 서울의 관악산이나 북한산 자락 어디라고 착각을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마다 보여주는 경치는 그 아슬함에 편안함을 더해준다. 아래쪽으로 보이는 대정향교와 그 뒤편에 향교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펜션 자리가 마치 한 건물인 듯 눈에 들어온다. 저 펜션을 자리 잡은 사람도 특이하긴 하다. 바로 향교에 붙여 펜션을 굳이 저렇게 넓게 만들 필요는 무에란 말인가.


능선의 끝자락에 닿았다. 바위가 천천히 내려가는 길목으로 가는 모드다. 이곳으로 내려가는 것 역시 제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바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남아있다. 내려가다 보면 크게 무리 없이 내려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빠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원래의 정상코스가 아닌 가장 만만한 부분을 골랐다. 


대정향교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이자 길의 비탈이 가장 만만해 보인다. 중간중간에 소나무를 베어낸 흔적도 보인다. 이 길을 택했다. 순간 이곳이 원래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려가는 길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미 소나무가 절단이 난 채 베어져 버린 흔적은 어느 등산로 못지않게 비탈이 적고 넓은 시각으로 길과 다름없었다. 다 내려오니 밭이 가로막고 있지만 그 사이로 난 길로 시간을 절약했다.


차를 세워놓은 대정향교 주차장이 코앞이다. 내려오며 뒤돌아보는 그 자리에 날개 자락을 퍼덕이는 듯 한쪽이 슬며시 감싸 안은 산세다.  북쪽보다는 남쪽의 단산은 사악한 기운을 느낄 여지가 크지 않음을 알겠다. 


향교에서 공부를 해도 될 만한 풍광이자 세월을 낚아도 좋은 경치다. 옆에 있는 산방산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이곳이 남쪽 대정이구나. 한껏 웃고는 주차장을 향해 걷는다.

단산의 우측 날개에 해당하는 봉우리. 박쥐의 날개와 비슷한 느낌을 절로 느낄 수 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대정향교와 산쪽으로 더 넓게 자리잡은 펜션단지.
바위사이에 난 길이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면 보이는 것 만큼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단산의 정상 봉우리 모습
단산을 내려오며 만난 나무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대정 향교를 향해 걸어가는길 뒤돌아 보니 눈에 들어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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